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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숨은 역사 2cm] 넥타이 원조는 유럽 종교전쟁 때 마귀 쫓는 목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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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19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에 맞춰 선거 벽보가 전국에 일제히 게시됐다.

정장 차림 사진을 벽보에 올린 남성 후보들은 넥타이가 돋보인다.

유권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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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평소에도 다양한 일정에 맞춰 넥타이 색깔을 바꾼다.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정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넥타이는 기원전 50년께 고대 로마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군인이 갑옷을 입을 때 목 부상을 막으려고 휘감은 긴 천이 원조라는 것이다.

이 천은 겨울 추위를 막고 손수건으로도 사용됐다.

그러나 넥타이 원형으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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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루이 14세가 크라바트를 착용한 모습



17세기 프랑스에서 선보인 크라바트가 넥타이 효시라는 게 정설이다.

크로아티아 군인이라는 뜻의 크라바트는 기독교 신구 교파 간 충돌로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에서 탄생한다.

이 전쟁은 스페인과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 대부분 유럽 국가가 가담한 첫 국제전이다.

프랑스는 크로아티아인으로 용병부대를 꾸려 참전했다.

용병부대는 터키군을 무찌르고 파리로 입성해 승전기념 행진을 벌인다.

이때 크라바트가 대중에게 공개된다.

용병들 목에 2~3회 감아 매듭을 한 일종의 목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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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구 교파 간 충돌로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



태양왕 루이 14세는 붉은색 크라바트에 강한 호기심을 보인다.

크라바트에 매료돼 프랑스 친위대 병사들도 착용하도록 지시한다.

크라바트 기원을 놓고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용병들이 루이 14세에게 충성심을 보이려고 가슴에 장방형으로 둘렀다는 게 첫 번째 견해다.

두 번째는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이나 연인의 무사귀환을 기원한 크로아티아 여성이 감아줬다는 것이다.

천으로 목을 단단히 묶으면 마귀가 몸에 침투하지 못한다는 믿음에서다.

악귀를 쫓아 승리하라는 염원을 담은 일종의 부적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옷에도 변화가 생긴다.

시민들은 활동하기 편한 재킷과 판탈롱 바지를 선호한다.

윗옷 목 부위에 장식 띠를 매는 풍습도 크게 달라진다.

크라바트는 좁고 긴 때로 바뀐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넓은 옷깃에 쉽게 감기 위해서다.

크라바트는 영국으로 건너가 오늘날 넥타이로 발전한다.

목에 매는 끈이라는 의미로 넥타이라는 이름이 생긴다.

이후 모양과 매듭 방식, 색상이 진화하면서 남성 액세서리로 자리 잡는다.

1850년대에는 앞쪽 매듭만 독립시킨 나비넥타이가 등장한다.

넥타이를 맸을 때 길이가 주먹 4배인 포인 핸드 방식은 1890년께 선보인다.

마부가 말고삐를 다루기 편하도록 고안된 매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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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는 남성 패션의 완성이자 원점이라는 말이 있다.

멋을 내는 데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아프리카 오지 봉사활동으로 반평생을 보낸 슈바이처 박사는 한 개 넥타이만 썼다.

그런데도 길흉사 의식에는 꼭 맸다고 한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대선 벽보에 나온 넥타이는 승리용 부적이나 국민을 섬기려는 의지의 상징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선거철 표심을 유혹하는 액세서리일 수도 있다.

유권자가 넥타이 의미를 제대로 읽는 식견만 갖춰도 한국 정치는 발전할 것이다.

ha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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