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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홍승일의 시시각각] 정치가 김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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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말고 정치 해도 풍운아였을 듯

공과 엇갈려 … 좋은 유산 이어 갔으면

중앙일보

홍승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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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부터 ‘세계 경영’의 기치를 높이 든 대우, 그중에 대우자동차를 모델로 경영학자 조동성(당시 서울대 교수, 현 인천대 총장)은 흥미로운 연구를 구상했다. ‘경쟁력이 있어야 해외에 진출할 수 있다’는 종전 이론을 뒤집어 ‘해외에 진출해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역의 가설을 세운 것이다.

이른바 ‘독점우위이론(monopolistic advantage theory, 찰스 킨들버거)’은 국제 경영학계의 정설이었지만 한국 같은 후발개도국 입장은 달랐다. 선진국 캐치업(따라잡기) 전략이 해외 진출을 통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달성된다는 걸 입증할 절호의 사례로 그는 대우에 주목했다.

그만큼 대우는 파격의 경영술로 외형적 팽창을 거듭하던 시절이었다. 해외 지사를 비롯한 글로벌 거점이 400여 곳, 중후장대·경박단소 업종을 막론해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는 대우의 김우중에게 해외 언론은 ‘킴기즈칸’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단시일에 몽골대제국을 일군 칭기즈칸에 빗댔다. 대우자동차는 폴란드의 동유럽 최대 자동차회사 FSO 매각 입찰에서 GM을 제쳐 글로벌 자동차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상누각이었나. 대우그룹은 97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2년 뒤 워크아웃(채권단 관리)과 함께 공중분해 됐다. ‘대우 신화’의 몰락과 함께 조 교수의 야심 찬 연구도 중단됐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 베스트셀러 자서전의 제목처럼 대우는 실력이 부족할 때 파이팅으로 메웠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라고 본다. 김우중 특유의 정치적 감각과 돌파력, 인맥이 있었다.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기업 영토를 확장하려면 국내외 네트워크의 힘이 필요했다. 그가 사업가이자 정치가적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리 부각되지 않은 듯하다.

90년대 대우 취재현장에서 그를 가까이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기억나는 몇 가지 장면들.-

김우중 회장이 다른 재벌 총수들과 판이한 점은 정치인과 정부 관리, 기자 만나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언론 활용술은 정치인 뺨쳤다. 단적인 예가 전세기로 세계 투어를 하는 통 큰 IR(기업홍보)이다. 러시아 임대 전세기에 취재기자 20~30명과 동승해 대우 사업장이 있는 나라를 일주일 남짓 숨 가쁘게 돌았다. 이문열·김용옥 같은 대표 지성들도 이 투어에 초청받으면 싫은 내색 하지 않았다. 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GM 간 불화가 심해지자 합작결별을 기정사실화하는 내용을 언론에 흘려 GM을 압박 했다.

아프리카·아시아 저개발국이나 사회주의 국가를 돌 때는 기업인보다 관료·권력자들을 즐겨 만났다. 얼르고 달래는 정치적 협상과 담판은 김우중식 비즈니스의 큰 장기였다. 기업가 정신을 넘어선 승부사 기질이었다.

정주영 현대 회장과 함께 역대 정권의 대북한 밀사를 도맡아 한 것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트럼프와도 20년 가까운 교분이 있다. 현역이라면 한·미 통상외교의 가교가 됐을지 모른다.

실제로 정치인이 될 뻔도 했다. YS가 당선된 92년 14대 대선 두 달 전에 대선 출마를 거의 결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선 정국에 한바탕 소용돌이를 일으킨 뒤 자진사퇴했다. 박정희에서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역대 통치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드문 기업인으로 꼽힌다. 정치 계절을 맞아 그려 본 김우중의 정치가적 모습이다.

지난 22일 저녁 서울 힐튼호텔 그랜드볼룸, 대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은 곧 대한민국 경제영토를 넓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한때 대통령을 꿈꾼 기업가의 말처럼 들렸다. 대우가 잘나가던 90년대 중반 6~9%대이던 경제성장률은 요즘 2%대마저 위협받는다. 행사장의 한 전직 대우맨은 "그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이 아쉬운 때”라고 말했다.

홍승일 논설위원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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