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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현장 속으로] CSI 장비·2억짜리 정밀검사기 4대 … 경찰도 국과수 대신 위폐 감정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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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국내 첫 설립해 많은 성과

감별사 18명, 수퍼노트 척척 골라내

작년 국내 유통 위폐의 86% 적발

전문 감별사의 노하우·역할 중요

초정밀 기계도 잘못 인식할 수 있어

경력 20년 전문역, 정년 후에도 근무

‘위폐감정 고급과정’ 경쟁률 10대 1

전문성 인정받고 영업 스트레스 없어

“확인할 지폐 많아 육체적으로 힘들어”

KEB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 가보니
중앙일보

KEB하나은행위변조대응센터 직원이 정밀광학분석기로 중국 100위안권의 자외선 반응을분석 중인 장면. 인민대회당 천장 부분만 현광반응이 나타난다. [사진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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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본시장에 건강한 혈액을 공급하고 화폐의 신뢰를 보증한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을지로의 KEB하나은행 본점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이러한 문구가 새겨진 유리 벽이 보였다. 그 안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18명이 컴퓨터 모니터와 기계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제약회사 연구실을 연상케 했다. 특이한 건 곳곳에 돈더미가 잔뜩 쌓여 있다는 점. 외부인 출입엄금인 이곳의 이름은 위변조대응센터다. 전국 영업점 창구로 들어온 화폐 45종의 위·변조 여부를 가려내는 곳이다. 국내 은행권에선 최초이자 유일한 위폐 감정을 전문으로 하는 독립 센터다.

“벽에 적힌 우리 센터 모토 보셨죠? 은행 환전이라고 다 똑같은 환전이 아니에요. 안정적으로 화폐의 신뢰를 보증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죠.”

위변조대응센터에서 근무하는 차혜인(31·여) 대리의 말이다. 그 자부심의 근거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국내 은행에서 적발한 위폐는 총 15만6647달러(미화 환산 기준)어치. 그중 86%인 13만4385달러어치를 KEB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가 적발했다. 이 은행이 취급하는 외환 규모가 은행권 전체의 25%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높은 적발 비율이다. 그만큼 투자를 했기에 가능하다는 게 이호중 위변조대응센터장의 설명이다.

“이건 현미경이 달린 영국산 최신 CSI(범죄분석) 장비인데요. 네덜란드와 중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이어 우리 센터가 전 세계 세 번째로 도입했습니다. 또 한 대에 2억원짜리 고성능 위폐 정밀검사기도 네 대를 갖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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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운을 입은 위변조대응센터 직원이 루페와정밀감정기를 이용해 외화 위폐를 감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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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B하나은행도 4년 전 처음 센터를 만들었을 땐 내부 반발이 적지 않았다. 금융권에 선례가 없고 예산도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성과가 입증되면서 반대 목소리는 사라졌다. 이 센터장이 “우리는 단순한 출납인이 아니라 감정인”이라는 논리로 경영진을 설득해서 하얀 가운이라는 복장도 얻어냈다. 지금은 경찰도 위폐 감정은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까지 가는 대신 이 센터에 맡긴다.

위폐를 감정할 땐 우선 지폐를 정밀검사기에 통과시킨다. 기계가 가시광·적외선·자외선 반응을 확인하고 잡아당겼을 때의 인장 강도, 기울기에 따라 색이 변하는 잉크의 사용 여부 등을 센서로 읽어 위폐로 의심되는 것을 뱉어낸다. 기계가 뱉어냈다고 해서 모두 위폐는 아니다. 진짜 화폐여도 표면에 뭐가 묻어 있거나 하면 기계가 잘못 인식한다. 인간 감정사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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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운을 입은 위변조대응센터 직원이 루페와정밀감정기를 이용해 외화 위폐를 감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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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센터장은 “사람 눈은 1억 개 화소를 가진 뛰어난 광학 장비”라며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의사가 암인지, 양성종양인지 진단을 내려주듯이 위폐도 최종 단계에서 사람이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육안으로 확인할 때는 보통 ‘루페’라고 부르는 돋보기를 이용한다. 하지만 경력이 오래된 전문역 직원은 단지 감으로도 초정밀 위폐인 수퍼노트를 척척 골라낸다고 한다. 노하우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위폐감정 경력 20년인 전문역 한 명은 정년이 지났지만 은행이 붙잡아서 여전히 일하고 있다. 그 노하우를 사장시키거나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전문성을 인정받는다는 점 때문에 매년 이 은행의 ‘위조지폐 감정 고급과정’은 지원한 직원 간 경쟁률이 10대 1에 달한다. 일반 영업점과 달리 영업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도 선호 이유다. 위변조대응센터는 제대로 위폐를 걸러내는 게 곧 은행 수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하면 된다.

박영현(33) 대리는 2013년 위변조대응센터가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일해왔다. 2003년 외환은행 TV광고에서 ‘이건 가짜야!’를 외쳤던 위폐 감별가 서태석 부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원했다. 그는 “하루에 확인해야 할 지폐의 양이 상상을 초월해서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게 예상 밖이었다”며 “최근 인도의 화폐개혁처럼 전 세계 각국의 급변하는 통화정책을 신경 써야 해서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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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진폐를 위폐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있어서 반드시 육안으로 최종 감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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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지폐는 최종 소지자가 책임져야 한다. 모르고 위폐를 받았다가 신고한다고 해도 보상받지 못한다. 지폐를 처음 받을 때부터 위폐인지 아닌지 확인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가정용 컬러프린터로 만든 수준의 위폐라면 세 가지만 명심해도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다. ‘만져보자, 비춰보자, 기울여보자’다. 진짜 지폐는 손끝으로 만져보면 오돌도돌한 느낌이 있고, 비춰보면 안에 숨어있는 그림이 나타난다. 색변환잉크로 인쇄된 숫자 부분을 기울였을 때 색깔이 달라지는 게 진짜다. 이 센터장은 “풀빵 파는 아주머니들이 물 묻은 손으로 지폐를 받았는데 그림이 번지는 걸 보고 위폐를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전했다.

해외여행이 늘면서 해외에서 위폐를 들여오는 여행객이 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바꿔치기 수법이 많다. 상점이나 택시에서 여행객이 위안화를 내면 상대방이 “당신 돈이 위폐다. 신고하겠다”고 화를 내면서 실제로는 진폐를 위폐로 바꿔 돌려주는 식이다. 여행객은 귀국 뒤 환전했던 은행에 가서 “왜 위폐를 줬느냐”고 따지지만 이미 바꿔치기 수법에 당한 뒤다.

위폐에 당하지 않으려면 국내든 해외든 환전상이 아닌 은행을 이용해야 한다. 또 해외여행을 할 땐 가급적 소액으로 환전해 가는 게 낫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견된 위폐는 주요 통화뿐 아니라 이집트 파운드, 말레이시아 링깃, 브라질 헤알화 등이 있었다. 사실상 전 세계 모든 화폐에 위조지폐가 있다고 보면 된다.

위변조대응센터는 전국 모든 영업점에서 위폐로 의심되는 고해상도 촬영을 통해 보내주면 고화질(HD)급 모니터로 실시간으로 감정을 해준다. 지난해 8월엔 KEB하나은행의 한 출장소에서 고객이 들고 온 과테말라 화폐 30장을 확인해 달라며 사진으로 찍어 보내서 바로 위폐로 감정하기도 했다. 고객이 처음엔 인근 다른 은행의 영업점에 갔지만 그곳에서 ‘하나은행으로 가시라’고 안내를 받고 온 경우였다. 이 센터장은 “만약 은행이 위폐를 걸러내지 못한 채 그 위폐가 은행의 띠지에 묶여서 홍콩 외환시장로 가면 해당 은행은 ‘위폐 수출은행’으로 찍힐 뿐 아니라 한국 금융의 망신”이라며 “환전 영업을 하는 은행이 위폐 감별에 투자를 안 하는 건 반칙”이라고 말했다.

[S BOX] 수퍼노트, 진폐와 똑같이 동판으로 찍어 판별 어려워
프린터로 인쇄해 만든 위폐는 루페(확대경)로 확대해보면 작은 점이 무수히 찍혀 있는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초정밀 100달러짜리 위폐인 ‘수퍼노트’는 루페로 봐도 점이 아닌 면으로 그림이 이뤄져 있다. 진폐와 똑같이 판화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수퍼노트는 국가급 시설에서만 제작할 수 있다. 위폐 제조에 필요한 판화의 동판을 새로 만들고 실제 지폐 제조에 쓰이는 것과 똑같은 용지와 색 변환 잉크를 구하기란 민간 범죄조직에선 불가능하다. 미국은 수퍼노트의 제조처로 북한을 의심한다.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에서 수퍼노트가 유독 많이 발견되는 게 그 이유다.

북한이 수퍼노트를 제조하는 건 외화벌이를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퍼노트를 한 장 제조하는 데 드는 돈은 20달러에 달하지만 유통되면 5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또 수퍼노트를 대규모로 유통해 미국 경제에 타격을 주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은 영국 파운드화 위폐를 대량으로 찍어 뿌리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베른하르트 작전).

수퍼노트를 최근에 나온 고성능 정밀감정기에 통과시키면 위폐로 의심된다며 기계가 뱉어낸다. 하지만 숙련되지 않은 은행원은 왜 위폐인지를 알 수 없어서 기계가 잘못 읽은 진폐로 오인하게 된다. 하지만 수퍼노트를 아무리 정밀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화폐를 찍어낸 원판 자체가 진폐와 다르다. 성분 함량도 조금 차이가 있다. 노하우를 가진 위폐감별인이라면 얼마든지 걸러낼 수 있다.



글=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장진영.한애란 기자 art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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