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순수의 희생을 먹고 자란 악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주원규의 다독시대

십자가 위의 악마
응구기 와 티옹오 지음, 정소영 옮김/창비(2016)

어쩌면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것은 독재의 망령이기보단 순수의 그늘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순수’가 갖는 가치는 막대하다. 종교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간 별다른 종교분쟁 없이 병립할 수 있는 평화의 지속이 그 증거다. 이러한 평화의 바탕엔 순수에 대한 존중, 곧 순수 정신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평화에 그늘이 깃드는 경우가 있다. 순수 정신이 제대로 된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을 때 독재가 순수의 자리를 대신해 온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 묻는다. 독재를 거든 그늘의 역사, 그 어리석음을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다고 취급되는 민중에게서 찾아야 옳은가. 아님, 평화와 화해를 원하는 민중의 순수 정신을 종교의 그늘에 숨어 수탈한 독재의 망령에 주목해야 옳은가. 답은 너무나 자명하다. 민중은 순수의 열망 하나로 뭉쳐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지도자를 아꼈고 권위를 존중했다. 하지만 독재의 망령은 이러한 민중의 순수를 처참히 짓밟았다. 그 비극이 오늘의 역사 위에 고스란히 쓰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민중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민중은 여전히 독재를 넘어선 살핌의 지도자가 출현하길 바란다. 미답의 이상처럼 요원해 보여도 정신개벽의 새벽이 찾아오길 갈구하는 것이다. 끔찍한 것은 이러한 민중의 순수 정신에 편승해 민중을 또 다시 개, 돼지로 길들이려는 악마의 출현이다. 악마는 순수의 그늘 뒤에 숨어 그 희생을 자신의 유익으로 취하는 데 천부적 재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악마를 설명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십자가 위의 악마>가 그렇다. <십자가 위의 악마>는 아프리카 현대문학을 이끄는 케냐 작가 응구기가 케냐의 지배층을 풍자한 희곡을 상연하다 교도소에 수감된 1977년께, 화장지에 은밀히 써내려간 작품이다. 백인 지배층이 케냐의 정치, 경제를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신식민주의를 신랄하게 고발하는 이 작품은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중이 그 고결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독립 이후 변변한 일자리 하나 없이 생계를 위협받는 비참한 처지를 묘사한다. 그와 동시에 독립된 케냐에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백인 지배층이 벌이는 ‘현대판 도둑질과 강도질 경연대회’란 일그러진 축제가 벌어진다. 이 경연대회는 독립을 위해 희생한 민중의 순수를 철저히 유린하는 지배계층의 부를 향한 광적인 집착을 경쟁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신랄한 풍자를 통해 독립된 이후에도 케냐 제국주의의 악마가 여전히 활개치는 현실을 고발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한다. 이러한 현실 고발은 2017년, 오늘의 한국사회에 적용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순수의 희생 뒤에 숨어 있다가 그 전리품을 자신들의 권력을 지속하는 데 악용하는 불순함이 한국판 악마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2017년 봄. 얼어붙은 들에 다시 봄이 오고 있다. 하지만 이 봄이 찰나의 미풍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민중의 희생을 먹고 자란 악마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도록 방치해두어서는 안 된다. 인간다움을 향한 절규를 탄압하도록 방임해선 안 되는 것이다. 오늘의 봄을 오게 한 순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여 시대의 틈새마다 썩은 곰팡이처럼 살아나는 악마의 싹을 철저히 경계하는 다중의 지혜가 요구되는 요즘이다.

주원규 소설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페이스북] [카카오톡] [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