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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천막사진관] 흙수저 최씨 삼형제 '풋살 요람'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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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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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Mall) 옥상에 미니축구장(풋살장)을 만들 수 있겠는가." 2011년 겨울, 한 대형몰이 파격 제안을 했다. 하지만 누구도 시원하게 답을 하지 못했다. 공사비가 만만치 않은데다 수익성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 스타트업이 '맡겨만 달라'면서 도전장을 던졌다. 30대 흙수저 '최씨 삼형제'가 창업한 스포츠마케팅 업체 진인眞人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17년, 진인은 매출 20억원 규모의 '풋살 요람搖籃'으로 성장했다. 삼형제가 흙바닥에서 흘린 땀의 결과다. 더스쿠프와 천막사진관이 최씨 삼형제의 고집과 마주앉았다.


# 제1장. 1997년 겨울 '좌절'

서늘한 마음 탓이었을까. 그날 따라 공기가 찼다. 칼바람이 아버지의 얼굴을 스쳤고, 그럴수록 낯빛이 어두워졌다. 사나운 바람만큼 무서운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차 부도입니다." 작은 무역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1997년 겨울 '외환위기의 덫'에 걸렸고, 어음을 막는 데 실패했다. 곤궁한 협력업체의 대금을 먼저 갚아주느라, 정작 자신의 빚을 해결하지 못했다.

평온했던 아버지의 일상에 풍파風波가 일었다. 회사는 물론 집에도 빨간등이 켜졌다. 아버지와 엄마, 삼형제는 36㎡(약 11평) 크기의 월세집으로 쫓기듯 밀려났다. 군을 제대한 맏이는 복학을 미룬 채 '가판(길거리 상점)'에 섰다. 국방부 의장대를 전역한 둘째는 돈벌이를 위해 '의전행사'를 다녔다.

화학박사를 꿈꾸던 막내도 욕심을 내려놓고 두 형을 따랐다. 삼형제는 그렇게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엄마는 눈시울을 훔치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세발자전거다. 함께하면 쓰러지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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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2011년 겨울 '장고'

그로부터 14년이 훌쩍 흐른 2011년 12월, 용산 아이파크몰 옥상. 끔찍했던 1997년 그날처럼 추운 날이었다. 칼바람이 삼형제의 얼굴을 스쳤고, 그럴수록 침묵이 길어졌다. 둘째의 꽹과리 같은 음성이 고요함을 깼다. "형! 지금이 기회야. 한번 해보자." 웬일인지 막내가 막아섰다.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단호했다. "유동성이 부족해. 검증된 사업도 아니고. 2년만 기다리자."

한달 전이었다. 삼형제는 아이파크몰 측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제안을 받았다. "몰(Mall) 옥상에 풋살장(풋살ㆍFutsalㆍ미니축구)을 만들고 싶은데, 할 수 있겠습니까?" 맏이는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두 동생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변의 평가와 전망이 너무 나쁜 탓이었다.

어떤 이는 맏이의 면전面前에 대고 조롱을 늘어놓기도 했다. "어이 젊은 양반. 몰 위에 미니축구장을 짓겠다고? 밑으로 축구공 떨어지면 어쩌려구. 건설비도 수억원이 들어간다면서…." '고(Go)냐 스톱(Stop)이냐.' 맏이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야속한 칼바람은 답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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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2016년 겨울 '희망'


20년 전이든 5년 전이든 겨울 칼바람은 독했다. 2016년 12월 그날도 그랬다. 뭐가 그리 뿔이 났는지 사람들의 얼굴을 마구 할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고요해지긴커녕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더 커졌다. "패스! 슛!"

5년 전 삼형제가 논쟁을 벌였던 아이파크몰 옥상에선 풋살경기가 한창이다. 시계침이 0시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희뿌연 열기를 온몸으로 내뿜으면서 공을 차기 바쁘다.

그랬다. 2011년 12월 맏이는 '고(Go)'를 외쳤고, 삼형제는 국내 최초로 몰 옥상에 풋살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25t 덤프트럭 54대 분량의 석분(흙)을 옥상으로 끌어올려 1ㆍ2ㆍ3경기장을 건설했다. 경기장에 30㎝가량의 흙을 깔 때마다 건설비가 1000만원씩 더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2ㆍ3경기장에는 세계 최초로 '수직 조명기기'를 세웠다. 수많은 비아냥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품질 좋은 풋살장을 만들어야 했다.

삼형제의 열정에 '풋살맨'들이 응답했다. 이곳 풋살장의 대관율(오후 6시 이후)은 수년째 100%다. 매월 1일 새벽 0시 온라인에서 '월 대관'을 접수하는데, 10분이 채 안 돼 매진되기 일쑤다. '몰 옥상 풋살장은 망할 것'이라는 기분 나쁜 전망을 열정과 실력으로 깨뜨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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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삼형제가 만든 흙수저 기업


"전략이든 플랜이든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한장의 종이에 불과하다."

- 짐 브로드헤드 FPL그룹 전 CEO -

'몰 옥상에 미니축구장을 만들겠다'는 돈키호테 같은 발상을 구현해낸 곳은 스타트업 스포츠마케팅 업체 '진인眞人'이다. 한장의 종잇조각으로 전락할 뻔했던 청사진을 맨주먹으로 용케 살려냈다.

진인은 2004년 최창덕(39ㆍ대표), 봉덕(38ㆍ부장), 재덕(37ㆍ주임) 삼형제가 창업한 '흙수저 기업'이다. 가판에서 '호객행위'를 하면서, 납골당에서 '의전행사'를 하면서 만든 꼬깃꼬깃한 종잣돈 5000만원으로 회사를 세웠다.

그 때문인지 곡절도 수없이 겪었다. 빈약한 자금력과 평판, 편견은 삼형제의 발목을 번번이 낚아챘다. 그럼에도 이들은 세발자전거처럼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서슬 퍼런 경제정글에서 13년째 생존하면서 사명처럼 '진정성 있게 일하는 사람들(眞人)'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진인'을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진인의 창업 연도를 보니 2004년이네요. 20대 초반에 창업했다는 건데, 말 못 할 사연이 있나요?

최창덕 대표(이하 맏이) :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무역업체의 실적이 괜찮았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버지의 무역업체가 어음 탓에 정상 운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죠. 저와 둘째는 그때 군대에 있었는데, 제대를 한 후에도 복학이 어려울 정도로 가계가 힘들었어요."

최봉덕 부장(이하 둘째) : "2000년대 초반 온 가족이 작은 월세집으로 밀려났어요. 월세가 100만원이었는데, 그마저도 내기 힘들었죠. 우리에게 복학은 꿈 같은 얘기였어요."

최재덕 주임(이하 막내) :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복잡할 때가 많았어요. '젊은 나이에 돈 벌어서 좋겠다'는 말은 속 모르는 소리였죠. 하루하루가 정말 전쟁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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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행운의 신은 없었다"


1999년 군대를 제대한 맏이는 '해보지 않은 일을 빼곤' 다 해봤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선 막대풍선(응원도구)을, 종로3가 역사驛舍의 가판에선 목도리ㆍ벨트 등을 팔았다. 월 100만원을 버는 것도 힘겨웠지만 쉼 없이 발품을 팔았고, 목 터져라 "골라골라"를 외쳤다.

계약직으로 입사한 스포츠마케팅 업체에선 '열정페이'라는 것도 받아봤다. 맏이는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좋은 경험을 했던 건 사실"이라면서 "특히 영세 스포츠마케팅 업체에서 일했던 경험은 지금의 진인을 만드는 데 알찬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둘째의 삶도 혹독했다. 2001년 전역 후 복학을 미룬 채 이벤트 업체에 들어갔다. 한푼이라도 벌 요량에서였다. 전통문화 재연행사 등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이벤트는 닥치는 대로 다녔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행사팀을 꾸리기도 했고, 그 때문에 설움도 많이 겪었다.

그렇게 3년. 맏이는 스포츠마케팅 업계에서 잔뼈가 굵어졌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땐 공식후원사들의 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둘째는 이벤트 판에서 저돌적인 '젊은피'로 통했다. 월드컵 경복궁 FIFA 환영만찬 의전행사(2002년), 종묘대제행사(2003년) 등 대형 이벤트를 둘째가 꾸린 팀이 진행했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요. 밑바닥에서 3년 동안 땀을 흘리니까 판이 읽히더라구요. 때마침 둘째도 이벤트를 잘 하고 있어서 힘을 합쳐보자 했죠. 둘이 2500만원씩 투자해 법인을 만들었어요. 막내가 합류하면서 지금의 진인이 됐죠."

2004년 4월 스타트업 진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밑천은 부모님의 도움도, 넉넉한 자금도 아니었다. 흙수저로 맨땅을 파면서 흘린 땀이었다. 하지만 연줄도, 돈도 없는 삼형제에게 세상은 여전히 야속한 존재였다.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그들 앞에 펼쳐지지 않았다. 행운을 선물할 신神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 제6장. 삼형제 이야기 直問直答 ➊

✚ 창업 초기 상황은 어땠나요?

막내 : "일감을 단 한개도 따지 못했어요. 구區 단위의 작은 행사도 어림없더라구요. '시장이 참 무섭구나'라는 걸 절감했죠."

✚ 눈앞이 캄캄했겠네요.

맏이 : "동생들에게 고개 숙이지 말자고 했어요. 우리만의 기획을 발굴하면 승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 추상적인 전략 아닌가요?

맏이 : "그렇지 않아요. '우리만의 기획을 만들자'는 건 어쩌면 전략의 핵심이에요. 그런 기획을 하려면 발로 뛰어야 하기 때문이죠."

창업 후 별다른 실적이 없었던 진인은 2005년 1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찾아냈다. '한국농구연맹(KBL) 10주년 사진전' 행사였다. 맏이는 "발품을 팔면서 진인스러운 기획을 만들었던 게 기회의 문을 열어준 것 같다"고 회상했다.

맏이 : "TV를 보다가 우연히 KBL이 출범한 지 10년째라는 말을 들었어요. 잘만 기획하면 멋진 이벤트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죠." 삼형제는 난상토론 끝에 '사진전'을 아이템으로 잡았다. 길을 가다 발에 툭 걸리는 뻔한 사진전이 아니었다. 사진전과 몰(Mall), 아쿠아리움, 서점, 음식점 등을 엮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드는 게 전략의 핵심이었다.

둘째 : "가장 먼저 코엑스몰을 찾아갔어요. 아쿠아리움ㆍ서점ㆍ음식점이 있어 적격이었죠. 각 매장의 관계자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진전'을 설명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이끌어냈죠."

막내 : "현장에서 얻은 결론을 토대로 KBL 10주년 사진전 기획안을 만들었어요. 제법 탄탄한 기획안이었죠."

✚ KBL은 어떻게 설득했나요?

맏이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강조하는 '엘리베이터 피치'를 떠올렸어요.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 짧은 시간에 누군가를 설득할 수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KBL에 용기 있게 전화를 걸었어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니 들어만 달라'고 요청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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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L 관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둘째 : "뜻밖에도 '그래! 들어나 봅시다'고 말하더라구요."

✚ 만난 후에도 반응이 괜찮았나요?

맏이 : "기획안을 보더니 '구현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어요. '자신있다'고 했죠. 그때부터 KBL 10주년 사진전을 준비했어요. 창업한 지 9개월 만에 얻은 사실상 첫 일감이었죠."

2005년 4월 15일~5월 15일 열린 'KBL 10주년 사진전'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사진전에는 하루 평균 3만명이 몰려들었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을 KBL 스타와의 데이트 코스로 만든 건 백미白眉였다. 사진전 방문객에게 '할인쿠폰'을 나눠준 음식점도 집객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 제7장. 삼형제의 겸양, 큰 울림

✚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네요. 원동력이 뭔가요?

"……"

어찌 답했을 것 같은가. 열에 아홉은 "우리 전략이 통했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면서 자찬自讚 아닌 자찬을 했을 거다. 삼형제는 조금 달랐다. "도와준 사람들 덕분이다"면서 되레 손사래를 쳤다.

삼형제의 겸양謙讓, 낯설지만 의미 있는 울림을 준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젊은 스타트업들에 꼰대처럼 '과도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아이디어로 승부하라" "창의력을 발휘하라" "그러지 못할 거면 집어치우라"는 식이다.

하지만 업력도, 레퍼런스도 턱없이 부족한 스타트업에 '아이디어ㆍ창의력ㆍ기술력으로 승부하라'는 제언이 가당키나 한 말일까. 자격ㆍ실적 등 숱한 제약 탓에 시장의 문턱을 넘기도 벅찬데, 뭘 어쩌란 말인가.

'KBL 10주년 사진전'의 성공은 분명히 삼형제의 공이자 진인의 업적이다. 하지만 발품을 팔면서 만든 기획안을 누군가가 '어린 놈들이 무슨'이라면서 외면했거나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슬쩍 바꿔치기했다면 지금의 진인도 없을 게다. 업력이 짧든 길든,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공정한 기회'를 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게 밑바닥 현장이 갈구하는 경제민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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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화려한 비상, 그리고 자만


"돈을 좇지 말자. 참고 기다리면 업력과 레퍼런스가 생긴다." KBL 10주년 사진전을 따낸 다음날 맏이는 두 동생에게 당부했다. 프로젝트를 프로답게 끝내면 또다른 기회가 올 거라는 얘기였다. 예상대로였다. 진인은 KBL 사진전 이후 '코엑스 3대3 농구 프리스타일' 'KBL 3대3 비치 바스켓볼' 등 굵직한 이벤트를 줄줄이 따냈다.

이듬해에는 업계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념해 '미니 알리안츠 아레나 경기장'을 짓고 치어리더대회ㆍ풋살대회 등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터졌기 때문이다.[※ 참고 : 알리안츠 아레나 경기장에선 2006년 독일 월드컵의 개막전이 열렸다.]

진인은 2005년 1월 첫 사업을 따낸 지 1년 반 만에 수억원을 벌어들였다. 그러자 그토록 야속했던 세상이 달콤해졌다. 삼형제는 성공에 취했고, 허세를 떨었다. 땀이 밴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값비싼 양복을 걸쳤다.

강남 삼성동엔 번쩍이는 사무실도 차렸다. '업계를 대표하는 공룡이 되겠다'면서 직원을 10여명 늘렸다. 하지만 초심을 잃은 '배부른 돼지'의 심장을 날카로운 부메랑이 겨냥하고 있다는 걸 삼형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왔다.

# 제9장. 삼형제 이야기 直問直答 ➋

✚ 초심을 지키지 못한 이유가 뭔가요?

맏이 : "2005년 여름에 대형 이벤트를 여러개 했어요. '뭘 해도 기본 매출은 올리겠구나' 싶더라구요.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엔 자신감이 자만으로 변했어요."

✚ 진인도 타격을 입지 않았나요?

막내 : "1년 새 한달 고정경비가 수천만원 늘었어요. 좋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인력을 무리하게 늘린 게 패착이었죠."

✚ 재무적으론 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을 텐데요.

막내 : "고정경비가 부쩍 늘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벤트 수주를 통해 충분히 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신사업도 있었구요. 그런데 신사업마저 말썽을 일으켰죠."

✚ 그게 뭔가요?

둘째 : "아이스링크 사업이었어요. 겨울철에 아이스링크를 운영하면 쉽게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섣불리 사업을 시작했죠. 전문성이 없어 외주를 줬는데, 추가비용이 만만치 않더라구요. 계산에 없던 비용이 줄줄 새는 격이었죠."

✚ 매출은 그대로인데 고정경비만 늘었군요.

막내 : "그런 셈이죠. 고민 끝에 인력 구조조정을 하고, 삼성동 사무실을 뺐어요(200

7년 6월). 그렇게 두 형, 저, 그리고 직원 1명만 남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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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장. 억제의 경영학


글로벌 패션의류업체 갭(Gap)의 창업자 돈 피셔는 자신의 성공 이유를 이렇게 비평했다. "자아를 억제한 덕분이다." 그렇다. 탐욕은 자가발전한다. 제때 제어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뻗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성공에 취한 삼형제가 그랬다. 초심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통제가 안 됐다. 날개가 꺾인 삼형제와 진인은 끝없이 추락했다.

삼성동 사옥에서 초라하게 몸을 뺀 삼형제는 잠실종합운동장에 새 둥지를 마련했다. 26㎡(약 8평) 크기의 반지하 사무실이었다. 기름기가 빠지자 정신이 돌아왔다. 양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밑바닥을 다시 누볐다. 외주를 맡겼던 아이스링크 사업은 둘째가 맡았다. 고정경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그게 둘째만의 방식이기도 했다.

초심을 찾으니 '조심스러움'이 따라붙었다. 누군가 '돈을 벌 수 있다'며 옆구리를 쿡쿡 찔러도 가볍게 달려들지 않았다. 타당성, 자금, 기회비용 등을 꼼꼼히 따졌다.

2011년 겨울, 삼형제가 풋살장 건설을 두고 갑론을박을 펼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맏이는 말했다. "1년 반이 조금 넘는 기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어요. 그때 욕심을 억제하는 법을 배웠죠." 페스티나 렌테. 삼형제는 그렇게 '천천히 서두르는 법(festina lenta)'을 배우고 있었다.(카게야마 도모이카의 「천천히 서둘러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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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장. 삼형제의 꿈과 희망


거품을 쏙 뺀 진인은 승승장구했다. 서울여자세계스쿼시대회(2009년 6월), 기아차 남아공월드컵 프로모션 총괄(2010년 3월), 프로야구 25주년 올스타전 전국프로모션(2011년 11월), 아디다스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프로모션(2015년 7월) 등 굵직한 이벤트를 성공리에 마쳤다.

심사숙고 끝에 첫삽을 떴던 풋살장은 진인의 대표상품이 됐다. 아이파크몰 옥상엔 1ㆍ2ㆍ3경기장, 수원역 AK플라자 옥상엔 1ㆍ2경기장을 개관했다. 진인이 '풋살의 요람搖籃'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유다.

좋은 평판만이 아니다. 실적도 빼어나다. 연매출은 20억원을 훌쩍 넘어섰고, '무차입 경영'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삼형제의 세발자전거가 '천천히 서두르면서' 질주하고 있다는 얘기다.

✚ 진인을 어떤 기업으로 만들고 싶은가요?

맏이 : "깨끗한 스포츠마케팅 업체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사명에 삼형제의 목표가 담겨 있는 셈이죠(웃음)."

둘째 : "풋살장의 잔디는 3년마다 교체해야 해요. 한 경기장당 4000만원의 비용이 들죠. 그래서 잔디적금을 만들었어요. 미래를 위해 월 400만원씩 적금을 붓는 거죠. 나중에 딴맘 먹지 않으려고 만든 통제시스템이에요. 바로 이게 진인이 가야하는 길인 것 같아요. 진인하면 '원칙'이 떠오르게 만들고 싶어요."

막내 : "실적보다 중요한 건 신뢰라고 생각해요. 누가 진인을 말하더라도 '저긴 정말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삼형제를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도 칼바람이 불었다. 2월 겨울바람은 사진 촬영을 위해 설치한 천막사진관의 틈새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삼형제는 어릴 때처럼 서로를 껴안으면서 추위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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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가 입을 뗐다. "진인을 창업하겠다고 했을 때, 풋살장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어요. 후회할 거라고, 망할 거라고… 다들 그렇게 말했죠. 하지만 전 자신있었어요. 듬직한 동생들이 있는데, 뭐가 무서웠겠어요(웃음)." 두 동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따뜻해진 칼바람이 세발자전거를 감쌌다.

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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