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1 (화)

[류근일 칼럼] 자유민주 시민체는 살아 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탄핵으로 보수 亡했다는 말, 보수 정치인에만 적용될 뿐

자유민주 유권자는 건재해… 자발적인 태극기 집회가 입증

가짜 진보의 적폐 청산 위해 死則生의 각오 가슴에 새겨야

조선일보

류근일 언론인


용어라는 게 참 부적절할 때가 많다. 보수-진보라는 말부터가 그렇다. '대한민국 만들기'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걸 '나쁜 함축의 보수'라 부르는 것도 우습고, 천안함 폭침을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우기는 걸 '좋은 함축의 진보'라 부르는 것도 우습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만들기' 과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그래서 그 과정에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해도 그걸 '공(功) 일곱, 과(過) 셋' 정도로 치는 사람들은 뭐라 불러야 할까? 흔히 보수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려깎는 투의 보수란 딱지엔 동의할 수 없다. '부역자' 운운하는 최근의 숙청 언어는 더더욱 가당치 않다.

이들은 내용상으로는 1948년에 대한민국을 세우기로 한 '그 이유'를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전체주의, 수령 독재, 인권 말살, 쇄국주의, 수용소 군도(群島)에 반대하고, 근대 계몽사상,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개인의 존엄, 공화주의, 세계시장, 서방(西方) 동맹, 자유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성장·분배 정책과 관련해서는 보수-중도-진보로 나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의 주축(主軸)을 통틀어 '나쁜 함축의 보수'라고?

이 주축이 요즘 들어 최순실 사태와 탄핵 인용으로 "폭삭 망했다"고들 한다. 그런가? 그렇지 않다. 설령 '폭망'한 게 있다 해도 그건 철학 없는 '이른바 보수 정치권'에 해당하는 것이지, 자유민주 유권자들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이들은 초기의 망연자실에서 깨어나 다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점은 수많은 '소속 없는 개인'의 자발적 태극기 집회 참여로 입증되었다.

조선일보

지난 11일 열렸던 태극기 집회.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정치적 대표 노릇을 제대로 했어야 할 보수 정당들이 빈혈증, 근(筋) 무력증, 인지(認知) 장애에 걸려 있다'뿐이다. '그게 결국 망한 것 아니면 뭐냐?' 할 것이다. 하기야 5월 대선에서 "천안함 폭침은 북한 소행이 아니다"고 해온 쪽으로 정권이 넘어가면 "그건 북한 소행이다"라고 해온 사람들에겐 큰 낭패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싸움에선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문제는 충분히 최선을 다해 유감없이 잘 싸웠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보수 정당들이 잘 싸우기는 고사하고, 잘 지지도 못할 것 같다는 게 자유 민주 유권자들의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묘수는 없다. 그러나 노력만은 해봐야 한다. 싸움은 해봐야 하는 것이다. 계백(階伯) 장군에게 "고작 5000명으로 왜 싸우느냐?" 충무공에게 "고작 배 12척으로 왜 싸우느냐?"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싸움은 불리할 땐 허겁지겁 탈영(脫營)이나 하는 얄팍한 기회주의 보수 정치인들에겐 기대할 수 없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의병(義兵)이 나설 수밖에 없다. 특정 인물을 위해서가 아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을 왜 세웠는가?" 하는 그 '존재 이유'가 행여 짓밟힐라, 자진해 태극기를 들고 나선 '나라 걱정 시민체(citizenry)'의 염원을 승화시키기 위해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야심가와 꼼수꾼이 대중을 동원해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는 중우(衆愚)정치의 위험성이다. 이런 건 물론 철저히 방비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가 이렇게 젖혀지느냐, 저렇게 자빠지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선 각계의 사심 없는 지식인, 지사(志士), 종교인, 문화인, 예비역 장교들이 나서 무능 무책의 보수 정치권이 하지 않거나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건 그러나 세속 정치 운동이 아닌, 철학적 통찰과 성찰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이것, 이러저러한 것은 그에 배치(背馳)되는 것, 바른길을 가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는 공론(公論)을 띄우는 예언자적 역할이다. 지금까지 지식인의 투신(投身)은 어느 한쪽의 전매특허처럼 돼 왔다. 그러나 '1948년의 대한민국 지지' 지식인들도 이젠 그럴 만한 상황이 됐다. 이건 보수 운동이 아니라 참된 진보 운동, 진정한 '적폐 청산' 운동이다. 가짜 진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완고한 독재 권력, 즉 적폐다. 이들이 아니면서도 이들이 두려워 그 눈치나 보고 영합하는 부류도 마찬가지 적폐다.

'점령군'은 말한다. "탄핵은 박근혜 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한 탄핵이다." "공무원들은 더 이상 부역 행위를 하지 말라." 법원은 문명고(高)의 국정 역사 교과서 연구학교 지정을 정지시켰다. 공무원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민간 거대 집단들이 어떻게 굴절하는지 볼만할 것이다. 자유 민주 진영이 그렇다고 실의에 빠질 건 없다. 사즉생(死則生)만 잘 새기면 된다.

[류근일 언론인]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