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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경제포커스] 법정에 선 95세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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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차학봉 산업1부장


"여기가 어디냐, 여기 있는 분들은 누구냐, 누가 나를 기소했느냐?"

20일 서울중앙지법 재판정에 휠체어 타고 들어온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은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는 "책임자가 누구냐. 나를 이렇게 법정에 세운 이유가 무엇이냐"고도 했다. 지팡이를 던지고 일본 말을 하기도 했다. 이날 신 총괄회장은 아들인 신동빈 롯데 회장과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장녀 신영자씨, 사실혼 관계의 서미경씨 등 가족과 함께 경영 비리 혐의로 기소돼 첫 재판을 받았다. 판사가 신 총괄회장을 향해 "재판 중인 건 아세요?"라고 할 정도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신 총괄회장은 95세 고령에다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다. 그는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한정후견' 관련 1·2심 재판에서 치매 상태라는 판정을 받았다. 롯데 관계자들은 "형사소송법상 치매라고 해도 재판에는 출석해야 한다"면서 "신 총괄회장을 치매로 인정한 한정후견 재판은 민사재판이기 때문에 형사재판에는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20일 재판 출석을 위해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김지호 기자


13만명의 종업원과 매출 90조원을 자랑하는 한국 5대 기업 창업자라고 해도 죄가 있다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치매를 앓아 자신이 처한 상황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신 총괄회장에게 이날 재판은 범죄 유무를 따지는 재판정이 아니었다. 치매 환자를 윽박지르고 공개 망신을 주는 자리였을 뿐이다. 일본 등 고령화 선진국에서 치매 환자에 대한 배려는 인권 문제이다.

가족이 함께 기소돼 재판정에 함께 서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동정론도 나온다. 롯데는 정부의 사드 배치 정책에 호응해 골프장 부지를 교환해주었다가 중국의 집중적인 보복도 당하고 있다. 10조원의 중국 사업이 날아갈 위기에 처했지만, 총수는 출국금지에 묶여 중국 내 사업현장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검찰이 신 총괄회장에 대해 조사를 벌이자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다. 일본 잡지인 사피오는 작년 11월 '너무나 가혹한 한국의 재일(在日)동포 차별'이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롯데에 대한 검찰 수사를 재일동포 출신 기업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비난했다.

사피오는 "검찰이 검찰 고위 간부 금품 스캔들과 (한국)재벌 기업에 대한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재일동포 기업인) 롯데를 선택했다"고 지적했다. 사피오는 자본 부족에 시달리던 빈곤국가 한국에 일본에서 어렵게 번 돈을 들여와 경제 성장에 기여한 신 총괄회장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색한 평가도 비판했다. 1960~70년대 재일동포 자본 유치를 위한 정부의 각종 특혜가 롯데의 급성장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롯데가 한국에 진출했을 당시 한국 정부는 롯데뿐만 아니라 국내 대기업에도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특혜를 제공했다. 사피오의 해당 기사에는 일부 과장된 표현, 사실왜곡,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논리가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유통거인(流通巨人)' 신격호 총괄회장의 공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고 허물에 대해서는 가혹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차학봉 산업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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