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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여적]저고리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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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걸그룹의 원조라면 1997년 결성한 베이비복스나 SES 등을 꼽는다. 하지만 그보다 60여년 전에 활약한 걸그룹의 비조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저고리시스터즈’다. 1935~1939년 사이 당시 OK레코드사를 설립한 이철(1904~1943)이 결성했다. ‘타향살이’의 고복수를 스카우트했고, 엘리지의 여왕인 이난영을 납치하다시피 모셔왔던 흥행의 귀재로 떠오른 인물이다. 이철은 ‘목포의 눈물’로 스타덤에 올랐던 이난영과 ‘연락선을 떠난다’의 장세정을 ‘비조 걸그룹’의 핵심보컬로 영입했다. 여기에 일본 쇼치쿠(松竹) 및 다카라스카(寶塚) 가극단 출신의 이준희와 김능자, 가수 겸 무용가인 서봉희까지 5인조 걸그룹을 만든 것이다. 해외파까지 가세한 당대의 톱가수와 무용가가 총출동해서 노래와 연기, 춤 등 다재다능한 재능을 선보였다. ‘눈물젖은 두만강’의 가수인 김정구는 생전에 저고리시스터즈의 무대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저고리시스터즈…. 얼마나 소박하고 우리 구미에 맞는 이름입니까. 이난영과 장세정이 색동저고리와 족두리를 썼고…. 서양노래를 부를 땐 새하얀 드레스로 맞춰 입고…. 이들이 무대에 서면 훤했습니다.”(동아일보 1973년 3월21일)

노래의 콘셉트에 따라 의상도 바꾸었으니 요즘의 걸그룹과 다를 바 없다. 저고리시스터즈는 이후 ‘아빠는 풍각쟁이야’의 박향림 등을 새 멤버로 들였고, 해방 후 해체됐다. ‘저고리…’의 계보를 이은 걸그룹은 1953년 결성한 ‘김시스터즈’다. ‘저고리…’의 리드보컬이었던 이난영이 두 딸(김숙자·애자)과 조카(이민자)를 발탁했다. 기타·베이스·드럼 등 20여개의 악기를 연주하고 춤까지 선보이며 인기를 끌었다. 1959년부터 14년간 미국무대에 진출했으며, <에드 설리반쇼>에 20여차례나 출연했다. 1962년 발표한 노래 ‘찰리 브라운’으로 빌보드 싱글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 김시스터즈의 미국활동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다방의 푸른 꿈’)가 곧 개봉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머니이자 고모(이난영)가 ‘비조’였다면 딸과 조카는 ‘한류의 원조’였던 걸그룹 역사가 이참에 재조명되겠다. 새삼 저고리시스터즈라는 토속적인 이름이 웃음을 자아낸다. 난무하는 정체불명의 외국이름보다 훨씬 정겹지 않은가.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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