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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묻지마 구조조정’을 묻는다…“국책은행 자본확충하면 기업들 살아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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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확충펀드도 출자가 아닌 대출일 뿐이지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 때처럼 금융 시스템에 위기를 가져올 정도로 시급하다면 모를까 지금이 그 정도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 돈을 지원한다고 한들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이 살아날지도 의문이다”(한국은행 관계자)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을 놓고 정부와 한국은행 등 관계기관간 논의가 한창이지만 국책은행 자본확충의 당위성에 대한 시각 차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하려면 누군가는 돈을 대야하지만 정부는 ‘여소야대’로 재편된 국회 의결을 받아야 하는 예산안 편성이나 관련 법 개정은 피하고 싶어한다. 자본확충펀드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한은의 발권력을 쓰자는 정부 압박을 어느정도 수용하면서도 한은의 책임과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취지로 내놓은 절충안이다. 하지만 자본확충펀드라는 중간 단계가 하나 더 생겼을 뿐 한은이 돈을 찍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왜 한은 발권력을 동원해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해주려는걸까, 국책은행 자본을 보강해주면 궁극적으로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이 살아날 수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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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에 있는 KDB산업은행 /김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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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은행들 상태가 어떻길래

기업 구조조정 이슈가 불거지자마자 정부는 들고나온 것이 국책은행의 건전성 문제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6일 구조조정 관련 브리핑에서 “앞으로 구조조정을 대폭 확대하면 국책은행들이 손실을 분담할 수 있는 능력, 즉 자본확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한국판 양적완화”라고 표현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이 불거졌으나, 정부가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려는 이유가 추가적인 경기부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적완화가 아닌 ‘구제금융’이 정확한 표현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책은행의 건전성 문제가 대두된 것은 현재 거론되는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에 물려있는 여신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보통 조선사들이 선박을 수주하려면 은행이 선수급환급보증(RG)을 서줘야 한다. 선주들은 선박을 주문할 때 선수금을 지급하는데 이후 계약대로 배가 인도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RG에 가입한다. 조선사가 만든 배가 무사히 선주에게 인도되면 금융회사 역시 일반 대출처럼 충당금 부담이 생길 위험은 적다. 그러나 선박을 수주해 최종 인도하기까지 적잖은 운영자금이 들어가고 업황이 나빠지면 손실 가능성이 높아져 일반 시중은행들은 RG 제공을 자제하는 편이다. RG 없이는 조선사들이 수주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같은 국책은행들이 대부분 떠맡아서 하고 있다. 수출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에 제공한 RG만 7조원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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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경우 이러한 보증 자체가 모두 부실 여신이 된다는 점이다. 자율협약 중인 조선사에 RG를 끊어주면 해당 채권은 고정이하 여신(NPL), 즉 부실채권으로 분류된다. 고정이하 여신 비율이 늘어나면 위험가중자산이 많아져 은행의 건전성 지표인 BIS 비율(위험가중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이 떨어지게 된다. 산은과 수은이 대우조선해양, STX조선, 성동조선 및 한진해운, 현대상선에 빌려준 여신 규모는 지난해 말 현재 20조원에 달한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에 내준 여신까지 합하면 40조원을 넘는다.

은행들은 부실에 대비한 손실을 흡수하기 위해 충당금을 쌓아둔다. 한진해운이나 현대상선에 대해선 산은과 수은도 어느정도 충당금을 쌓아두고 있어 양대 해운사 부실에 대한 흡수 능력은 그나마 괜찮다는 평가다. 문제는 조선사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부실채권이 아닌 정상 여신으로 분류돼 있어 그동안 충당금을 거의 쌓지 않았다. 지난해 말 현재 BIS 비율을 보면 산은은 14.28%로 나쁘지 않지만 지난해 3조원 이상의 당기순손실을 낸 대우조선해양의 잠재적인 추가 손실 가능성이 남아 있다. 수은은 10.11%로 간신히 두 자릿 수를 유지했지만 조선·해운사들의 추가 부실이 발생할 경우 한 자릿수로 하락이 불가피해 금융당국의 최소 권고기준(10%)을 밑돌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말 현재 산은과 수은의 부실채권은 각각 7조3000억원, 4조원 규모에 달한다. 수은의 경우 해외건설, 선박 등 주요 해외개발 산업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어 수은의 지급보증 능력은 해외 발주사 및 선주들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부가 국책은행 자본금 확충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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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시 옥포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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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넣으면 살아날 수 있나

국책은행에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는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이들 기업이 현재 어떤 상태이고, 살릴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디까지 살리고 버릴지에 대한 판단이 나와야 얼마가 필요한지도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부가 “다음달 말까지 안을 내놓겠다”며 운영중인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는 이름 그대로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정보 공개도 이뤄지지 않은 채 비공개 논의만 무성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수 만명의 생계와 막대한 자금이 달린 문제를 정부가 정보를 독점한 채 여론 수렴도 없이 비공개로 논의하는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에 대규모 여신을 내주고도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국책은행부터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의 최대주주인 산은은 최근 2년간 4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하고 수년간 낙하산 임원을 내려보내면서도 회사의 생사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금융권에선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정한 추산액이 거론된다. 국책은행 자본확충 규모는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의 법정관리 가능성, 손실 확대 범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일각에선 산은과 수은의 BIS 비율을 각각 1%포인트 올리는데에 2조4000억원, 1조2000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수은의 경우 2조원 수준의 추가 증자가 있어야 BIS 비율이 10%를 안정적으로 넘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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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은행자본확충펀드 조성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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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국민 부담

현재 논의중인 자본확충펀드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시중은행들의 손실 흡수능력을 높여주기 위해 만들었던 전례가 있다. 당시 한은이 산업은행에 채권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고 산은이 은행자본확충펀드에 다시 대출을 해 이 돈으로 은행권의 신종자본증권(코코본드)이나 후순위채 등을 매입,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높여주는 방식이었다. 당초 20조원 규모로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높은 이자와 까다로운 대출 조건 등으로 은행들의 수요가 적어 실제 집행액은 4조원이 채 안됐다.

사실 정부는 한은의 대출을 전제로 한 자본확충펀드보다는 한은이 국책은행에 현금을 직접 지원하고 지분을 받는 출자 방식을 원한다. 한은이 출자를 하게 되면 국책은행의 대주주가 돼 구조조정에 따른 책임과 손실도 한은이 지게 된다. 정부로선 국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피할 수 있고 향후 구조조정에 대한 책임도 한은과 나눠질 수 있는 최선의 카드인 셈이다.

하지만 현행법상 한은이 산은에 직접 출자하는건 불가능하다. 수은에 대해선 외환위기 직후인 1999~2000년 한은이 9000억원을 출자해준 전례가 있지만 이는 2011년 개정된 한은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한은의 대출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뤄진 것이라는게 한은 쪽의 설명이다. 더욱이 현행 수출입은행법은 ‘결산 순손실은 수은의 적립금으로 보전하고, 적립금이 부족하면 정부가 보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수은 부실은 한은 발권력 동원이 아닌 정부 재정으로 메꾸는게 원칙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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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은 자본확충펀드가 조성되더라도 ‘손실 최소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대출에 대한 담보나 정부의 지급보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주열 총재는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중앙은행이 대출을 해주든 채권 매입을 하든 원칙적으로 손실을 봐선 안 된다”고 말했다. 매년 한국은행 이익금의 70%가 수익금으로 국고에 편입되는데, 한은 자금이 투입된 국책은행이 부실화되면 결국 국민 세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은의 대출 결정은 내부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한은법 25조는 ‘금통위가 고의 또한 중대한 과실로 인해 한국은행에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금통위원들이 연대해 손해배상책임을 진다’고 돼 있다. 한은 내부에선 “나중에 잘못되면 청문회 불려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한은으로선 대출에 따른 손실 가능성을 거의 ‘제로’로 만들어야 움직일 수 있는 셈이다.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는 19일 2차 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을 포함한 정책조합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지만 의견이 모아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특정 기업 지원을 위해 국민 부담을 늘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간 구조조정을 방치한 청와대와 정부 당국자, 국책은행, 기업 경영진들에 대해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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