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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정치는 감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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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다수의 언어’로 말하라

정치철학자가 본 필리버스터, 개별 정치인의 요구를 합리성의 언어로 당론화하는 것이 임무

한국에서 정치 논평을 쓰는 일은 매우 어렵다. 글 쓴 다음날이면 정세는 새 국면으로 이행하기 일쑤다. 근 열흘간 지속된 필리버스터가 중단된 지 이틀 만에, 야권 통합이 모든 논의를 흡수하고 있다. 왜 한국 정치의 열광과 망각은 이렇게 빨리 교차하는가? 왜 정치의 감동은 곧 사라지거나, 감동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다시 한 번 대의민주주의와 인간의 감정이라는 근본 질문으로 돌아가자.

경향신문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2016년 예산안이 표결처리돼 정의화 국회의장이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국회의 본령은 ‘입법’, 즉 법을 만들고 법률로써 행정부와 사법부를 견제하는 데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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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parliament)는 말하기의 공간이다. 종종 발생하는 신체적 충돌조차 정치적 언어행위의 일부를 이룬다. 의회의 언어를 편의상 두 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 언어’다. 여기서 단어와 지시 대상의 관계는 유동적이고, 말하기는 논리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정치적 레토릭을 떠올리면 된다. 둘째는 ‘합리성의 언어’다. 이 경우 단어와 지시 대상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말하기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논리성은 분명히 정의된 이론적 개념을 요구한다. 정치 언어와 합리성의 언어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언어라기보다 같은 언어의 두 가지 상반된 사용법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예컨대 청년을 ‘만 15세 이상 34세 미만 인구집단’이라고 정의하면 합리성의 언어지만, ‘꿈과 희망을 포기한 미래 세대’라고 하면 정치 언어로 활용될 수 있다.

제도 권력은 합리성의 언어에서 나와

정치 언어의 기본 기능은 대중을 ‘우리편’으로 만들어 ‘상대편’과 맞세우는 것이다. 합리성의 언어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대중의 의식은 감정, 욕망, 막연한 관념 따위의 이질적 요소들이 뒤엉킨 실타래와 같다. 합리성은 그 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대중의 말과 행위가 합리성의 테두리에 갇히지는 않는다. 정당이 대중과 공감하고 소통하려면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언어, 즉 정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예컨대 청년을 건조한 통계적 개념이 아니라 ‘N포 세대’라고 불러야 광범위한 젊은 유권자 집단과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고, 반대 진영을 ‘청년의 꿈을 빼앗은 자’로 규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말은 그럴 듯한 격언이다.

한편, 정당이 합리성의 언어를 갖추어야 하는 첫째 이유는 의회가 입법기관이라는 사실에 있다. 법은 가장 완전한 합리성의 언어이므로, 정당은 자기 언어를 분명히 정의된 이론적 개념으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입법이란 정치 언어로 표현된 대중의 요구를 법적 합리성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두 언어 사이의 이러한 번역 과정이 대의제의 기본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위의 사례에서 정당의 목표가 단지 청년 유권자의 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것이라면, 이제 ‘N포 세대’의 문제를 분명한 이론적 개념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 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 제도화된 권력은 정치 언어가 아니라 합리성의 언어에서 나온다.

의회정치가 시민의 의사를 대의하는 과정은 결코 연속적이지 않다. 대의(represent)는 재현(re-present)이다.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담은 정치 언어와 그것을 재현하는 합리성의 언어 사이에는 날카로운 단절이 존재한다. 재현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단순해지며,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이는 대중의 요구에서 합리성을 남기고, 비합리성을 버리는 취사선택이 아니다. 언어의 번역이 텍스트의 재창조인 것처럼, 정치 언어를 합리성의 언어로 재현하는 것 역시 일종의 창조 과정이다. 이러한 창조적 재현이 정당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공감과 소통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대중의 요구를 강력한 합리성의 언어로 구축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정당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왜 열광적 반응을 끌어냈는가? 테러방지법이라는 이슈 자체가 결정적 요인은 아닐 것이다. 온라인을 통해 직접 소통할 수 있었던 대화 형식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마국텔’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그것의 매체적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국회의원 1인 생방송과 실시간 댓글로 화답한 시청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소통방식을 창조했다. 인터넷 대중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정치 언어의 개발이 대중적 열광의 조건임은 안철수 현상이 이미 증명했다. 의회를 스튜디오 삼아 펼쳐진 192시간의 ‘마국텔’은 거의 모든 사회적 이슈를 다뤘다. 모니터 속 BJ, 정치인과 시청자, 시민이 일대 일로 마주하며 형성된 친밀감은 정치 언어와 합리성의 언어를 넘나드는 소통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정당정치의 관점에서 이는 절반의 평가다. 중요한 것은 ‘개별 정치인을 넘어 정당이 이러한 공감을 어떻게 재현했는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야당은 필리버스터의 언어로 표현된 요구를 합리성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그 번역작업의 핵심에는 국가권력과 시민의 사적 영역 사이에 경계선을 설정하는 문제가 놓여 있다. 즉, 집권당과 대통령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안보를 위해 국가가 시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한계를 원리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그런 규정의 내용에 따라 정당의 정체성이 결정될 것이다.

새 소통방식을 창조한 192시간의 ‘마국텔’



경향신문

2월 24일 10시간 넘은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은수미 의원. / 김창길 기자


무제한 토론에 나선 정치인 중 일부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럼 더불어민주당의 당론은 어땠는가? 당은 입을 다물었다. 대테러 컨트롤타워를 국정원이 아니라 국민안전처에 두자는 건 핵심을 회피하려는 꼼수에 가깝다. 애초에 테러방지법에 대한 당 차원의 일관된 입장이나 전략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 일각에서는 이러한 이슈 전체를 ‘이념 갈등’이라 부르며, 총선전략을 경제 프레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들에게 ‘시민의 기본권과 국가권력’ 따위는 쓸모없는 ‘이념적 주제’에 불과할지 모른다.

정당의 이념이란 무엇인가? 정당의 정체성 자체다. 정치 언어를 합리성의 언어로 재현하는 과정 전체가 이념에 의존한다. 정상적 정당이라면 필리버스터가 종합한 이질적 요구들을 바탕으로, 시민의 기본권, 테러와 국가안보, 정보기관의 권한 등에 관한 당론을 합리성의 언어로 구성할 것이다. 이러한 대의 재현 과정이 정당 권력의 원천이다. 반면, 지금 야당을 지배하고 있는 ‘반 이념’은 정당의 기본 기능을 부정한다. 이념 없는 정당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를 구성하지 못한 채, 일시적인 정치 언어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경제 프레임은 합리성의 언어로 구성된 경제정책이 아니라, ‘중도’라 불리는 유권자 집단의 공감을 얻기 위한 또 다른 정치 언어일 뿐이다.

필리버스터 중단의 정치공학적 타당성은 면밀히 따져보면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의 ‘반 이념적 경향’이 불러올 두 가지 결과다. 첫째, 필리버스터의 감동은 재현작업 없이 잊힐 것이다. 둘째, 반 이념적 경제 프레임이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 해도, 다시 한 번 일시적 감동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정당의 기본 임무는 버려진 채, 감동을 찾아 부유하는 정치만 남는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선전할 수도 있겠지만, 이념 없는 정당, 감동을 권력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정당이 과연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지 회의적이다.

<박이대승 정치스튜디오 회원(프랑스 툴루즈 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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