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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당 대포' 정청래, '공갈' 딛고 '재조준' 준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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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머니투데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칭타칭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포'다. '촌철살인' 하는 그의 입심은 매번 주위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잘못 쏜 대포로 인한 좌절도 있었다. 자칫 20대 총선에 나서지 못할뻔도 했다.

정의원은 지난해 6개월의 징계기간 동안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으며 역경속에서도 애국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조들의 충정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에 대한 무게감도 돌아봤다. 정 의원이 20대 총선에서 당선된다면 3선의 중진의원이다. '업그레이드 당 대포'가 될지 총선후 그의 또 다른 정치인생이 주목된다.

[자칭 '당 대포', '공갈발언'으로 업그레이드?]

2015년은 정 의원에게는 행운과 불운이 동시에 일어난 해다. 그 해 2월 재선의원으로는 보기 드물게 최고위원으로 당선됐다. 대의원투표에서는 최하위였지만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에 최고위원 선거에서 2위로 당선됐다.

그러나 최고위원이 된 후, 결국 '설화(舌禍)'가 터졌다. 작년 5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 회의에 나온 '공갈발언'이다. 당시 최고위원이었던 주승용 의원이 최고위원 사퇴를 번복한 것을 빗대어 '공갈사퇴'라고 발언했다. 정 의원의 이 발언에 결국 주 의원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고 그는 최종적으로 6개월간 최고위원의 직무가 정지되는 징계를 받게 된다.

정 의원은 주승용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과 사돈의 팔촌 쯤(주 의원은 정의원의 큰 처남과 친구다.)되는 절친한 사이다. 그는 주 의원이 아니었더면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위기는 오히려 인간 정청래에게는 기회가 됐다. '말'로 먹고 살던 정 의원에게 '말'할 기회가 없어진 것이 오히려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펀치'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면서도 "옳은 소리 바른 소리 하는거야, 국민들에게 속시원하게 하는 거야 그런 정도로 인식했는데 내 말발이 무기가 될 수 있다.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그걸 인정했다"고 말했다. 원치않게 찾아온 시련의 시기였지만 이 기간이 야당 당 대포의 가늠쇠를 재조준 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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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정 최고위원은 '공갈 사퇴' 파문으로 당직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후 윤리심판원의 사면으로 이날 최고위원회의에 복귀했다. 2015.9.30/뉴스1


[野性 회복…'결기'가 필요한 때]

정 의원은 역사 발전은 '진보'의 몫이라고 확신했다. 그에게 진보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이다. 자칫 진부해 보이는 정의지만 그는 잘못된 정책의 개선과 새로운 아젠다를 만들어내는 철학의 변화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잘 못된 것들이 '보수'의 옷을 입고 있어 이를 변화시켜야 하며 그래야 여당과 맞설수 있다고 했다.

"1972년 DJ(김대중)가 장충단 공원에서 예비군 폐지를 주장했었다. 이걸 막지 못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총통제로 갈꺼라고면서 말이다. 당연히 용공으로 몰렸다. 요즘 정치인들이 DJ를 닮고 싶어하지만 그런 결기가 없다"

정 의원은 1972년 김대중 대통령의 장충단 유세를 좋은 예로 봤다. '야성'이란 '결기'라고 주장한다. 여러갈래로 나뉜 야권의 상황에 대해 야당의 몫은 '제대로 된 반대'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제를 가지고 정부에 대응할지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는 야성은 '태도'의 문제라고 봤다.

[인생설계서, '2004년 17대 국회의원 당선']

그는 27살때 감옥에 있으면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시절 그의 전부였던 '통일'이라는 화두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는 '정치'를 대안으로 봤고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1994년 그는 친구와 함께 인생설계서를 썼다.

학원 운영 틈틈히 미래의 정치인을 위한 ‘내공’은 쌓았지만 정치현실의 벽은 높았다. 그를 마포 국회의원으로 만든 것은 ‘노사모’였다. 2004년 선거를 준비하면서 정 의원은 ‘마포 노사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잘 나가던 학원에서 맨몸으로 나와 17대 총선에 도전했다. 정치경험이 없었던 그는 그 무렵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중앙위원회에 청년대표 자격으로 당선됐다. 그리고 그는 인생설계서처럼 2004년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18대 국회에서는 낙선했다. 18대 총선 당시 서울에서 야당이 참패하는 과정에서 그 역시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반장하기 싫었던 아이, 대학 시절 두 번의 감옥행]

정 의원이 중학교 2학년 시절. 이미 1학년때 반장을 했던터라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다시 반장자리를 맡겼지만 그는 몽둥이 세례를 버티면서까지 거부했다. 그의 중학교 1학년 반장 시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였다. '대리폭력'이 부끄러웠다는 그는 결국 이후에 반장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85학번, 586 운동권 세대인 정 의원에게도 두 개의 '별'이 있다. 첫 번째는 1988년 건국대학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나서였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둔 당시 대학에서 조통위원장이 되는 순간, 구속되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는 당시 언론에도 대서특필됐던 1989년 미대사관 점거농성 때문이었다. 미국의 재외 공관을 점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 의원은 이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2년간 복역했다. 그가 목포 교도소에 복역중이던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열사 사건을 들으면서 정치 입문의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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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의원의 25년된 지갑. 1991년 매형이 선물로 준 지갑이다. '우정등심'이라는 정육점의 사은품 지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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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학원장, 정청래]

두번의 복역을 마친 정 의원은 학원강사를 직업으로 택했다. 당시 대학시절 제대로 학교를 다닐 리가 만무했던 그 시절 '운동권'들 중 상당수가 본업 또는 부업으로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었었다.

그가 1994년에 시작한 학원사업은 대 성공이었다. 그가 학원을 그만둘 당시 강사 100명에 학원생 1500여명이었다. 그는 후배 강사들에게 학원을 통째로 내어주고 몸만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는 학원 운영시에 '강사 다면 평가제'를 시행했었다. 요새 기업들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1990년대에는 그 이름조차 생소했던 제도다. 그는 "강사 다면평가를 시행하다보니 노사갈등이 없었다. 실제로 원장인 나는 교사들간 평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10% 정도만 관여했다"고 말했다.

"학원비를 깎아 달라는 학부모는 직접 오게했다.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면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찾아온 분 중에는 단 한명도 거절하지 않았다. 삭감분은 직접 적게했다. 그렇게 한달에 학원 전체로 3000만원 정도를 깎아줬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렇게 학원비 혜택을 받은 분들이 다른 수강생을 데리고 오더라."

그가 학원을 운영할 당시는 IMF전후. 사교육을 공교육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에 학원비는 큰 부담이었다. 그는 어려운 수강생들에게 과감하게 학원비를 감해줬다. 학원비는 깎아줬지만 그는 손해를 보지 않았다.

[의정활동도 '수준급'…19대 국회 170건 법안발의]

국회 상임위원회의 간사는 실질적인 상임위 운영을 책임지는데 보통 재선의원이 담당한다. 국회가 상반기 하반기 두 번의 원구성을 하는 과정에서 간사는 한번 정도 하게 된다. 정 의원은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정보위원회 간사를 맡았고 후반기에는 안전행정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4년 동안 '간사'를 역임했다는 것은 그 만큼 의정활동에 대한 당내 평가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2월 5일 기준으로 정 의원이 19대 국회서 발의한 법안은 170건이다. 이중 45건(대안반영 41건, 수정가결 4건)이 본회의에서 처리됐다. 발의 개수로는 19대 국회에서 상위 10위권에 안에 든다. 본회의에서 처리된 법안 성적도 상위 20위에 들만큼의 입법 성적이다.

정 의원은 야당 내 만들어진 특별위원회에도 자주 이름을 올린다. 주로 권력형 비리와 관련된 부분이다. 가장 최근에는 국정원댓글진상조사특별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이외에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단 진상조사단, 국정법 개혁 특위 위원, 정치검찰공작수사 대책 특별위원회 등에도 참여했었다.

[주요법안-공직선거법, 북한 영유아지원법]

정 의원이 19대 국회 개원 당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언론방송 분야였다. 정 의원의 19대 국회 1호법안이 해직언론인의 복직과 보상을 위한 특별법이었다. 소관 상임위에서 수차례 논의됐었지만 결국 이 법안은 19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정 의원의 주요법안 중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법안은 공직선거법이다. 개표 직후 5%를 임의 수개표 해서 개표불신을 없애자는 취지지만, 아직 국회 소관상임위원회인 안전행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아쉬워 하는 법안은 따로 있었다. ‘북한영유아지원법’이다. 이 법은 북한의 영유아에게 인도적 지원을 위한 법안이다. 19대 국회 초반 외교통일위원회 시절 제출한 법안이다.

그는 "축구공은 망치로 때려서는 바람을 못 뺀다. 송곳으로 찔러야 바람이 빠진다. 탱탱한 긴장관계 남북 관계를 송곳 하나로 바람을 빼서 유화국면으로 갈수 있는게 뭔가 하다가 북한 영유아 지원법을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자는 것"이라고 발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촌철살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애들 지원한다고 해서 핵무기 만든다고 못 할텐데..."

[요주의-둥글둥글 해질 때]

겉으로 보이는 정 의원의 이미지는 ‘강성’이다. 시원시원한 말로 정부여당을 비판하다보니 '호불호'도 강하다. 정치인에게 호불호가 강한 것은 장점이지만 약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 의원은 이미 지난 18대 총서선에서 한차례 경험이 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 정 의원에 대한 기사로 법정 싸움까지 갔었다. 비록 최종적으로 승소했지만 그는 4년간 야인으로 살아야 했었다. 그의 무기인 '말'도 마찬가지다. '공갈발언' 사태에서 보이듯이 순발력 있는 대응은 반대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프로필]

△1965년 충남 금산 출생 △대전 보문고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 △17대·19대 국회의원(서울 마포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가계부채특별위원회 위원장 △19대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정보위원회 간사 △19대 국회 국정원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간사 △19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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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기자 ykpark@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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