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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일)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14] 왕수복·선우일선 등 평양기생, 유행가 무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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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아 레코드사는)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명창들의 소리를 세상에 소개하기 위하야 9월 중순경부터 조선 무명 명창의 소리를 '레코-트'에 너흘 터이라는 데, 희망하는 자는 동회사의 문예부로 가서 말을 하든지, 또는 신청을 하면 시청한 후에 소리판에 너허 준다한다."(1930년 9월 1일자)

축음기와 레코드가 만들어낸 '유행가 범람시대'는 대중 가수를 필요로 했다. 레코드 회사들은 처음엔 '신청하면' 들어보고 '레코드에 넣어' 준다고 했지만, 가수 수요가 폭발하면서 곧 신인 발굴을 위해 발로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랑목으로 화장한 노래가 판을 쳐', 목소리만 떨면 가수로 알던 '노랑목 전속 가수 황금기'(1934년 4월 18일자)에, 소리를 배운 소양이 있는 데다 레코드로 익힌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에 일조하던 기생은 신인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타깃'이었다.

1933년 5월 '콜럼비아'는 '유행가의 여왕' '반도 제일 인기 화형(花形)'이란 명성을 얻는 평양기생 왕수복(王壽福)을 발굴, 일본에 레코드를 취입하러 보냈다. 그러나 왕은 레코드회사 간의 가수 쟁탈전에 휘말려 5개월 만에 '포리돌'로 이적했다.

콜럼비아는 아예 '조선 팔도에 숨은 천재'를 찾겠다며, 전국 10곳에서 예선을 치르는 콩쿠르대회를 개최하며 반격에 나서 고복수(高福壽) 등을 발굴했다.(1933년 9월 14일, 1934년 3월 7일자)

'포리돌'은 평양기생 출신 선우일선(鮮于一扇)을 또 발굴했고(1934년 3월 25일자), '빅타'는 선우일선과 기생학교 동기인 김복희(金福熙)를 스카우트했다. 선우일선은 '미인으로 소문이 더 노픈' 가수였고, 김복희는 '순정을 노래하는 북국의 가인(歌人)'이었다.(1937년 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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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평양기생 출신 가수는 금방 가요계를 장악했다. 경성방송국이 1934년 조선 아악(雅樂)을 일본에 처음 생중계로 소개할 때는 왕수복을 출연시켜, "옥반을 굴러가는 구슬 소리가티 맑고도 아름다운 조선 아가씨의 귀여운 노래가락"도 전 일본에 중계했다. 왕이 부른 유행가는 당시 인기 절정의 '고도(孤島)의 정한(情恨)'과 '눈(雪)의 사막'.(1934년 1월 7·8일자)

잡지 삼천리는 1934년 9월호에서, "레코-드계 인기는 지금 평양기생들이 독점하는 중"이라며, "포리돌의 쏘푸라노 전속가수 왕수복이 헤성가치 나타난 뒤, 또 선우일선이 뛰여 나와 인기를 독점하는 판"이라고 전했다.

삼천리가 실시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에서 왕은 남녀 통틀어 최고표를 얻은 '가수왕'이었고, '꼿을 잡은' 등을 부른 선우는 여가수 2위, 김은 5위였다.(삼천리 1935년 10월호) 이들 외에도 최연연, 김연월, 한정옥, 최명주 등 평양 기생출신 '레코드 가수'는 즐비했다.

기생들이 잇달아 가수로 데뷔하자 평양 기생조합(기성권번)은 "가수가 되는 기생은 건방지게 되고 풍긔 문제"가 발생하는 폐단을 들어, 기생의 '레코드 취업'을 금지하기도 했다.(1934년 10월 7일자) 유명가수가 되자 '오입장이' '호사가'들이 비행기까지 대절해 경성에 불러 올려, '비행기 원정'이란 말까지 나왔기 때문이다.(1937년 1월 6일자)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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