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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그 시절, 그 사람은] (4) 2003 노무현 前 대통령, 이상론에 치우친 개혁.. 평가도 좌·우파 엇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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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대한민국은 큰 변화를 겪어 왔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미국발 금융위기,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9·11테러, 가계 부실, 집값 하락, 내수경기 침체, 세월호 참사 등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사다난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도 명멸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창간 14주년을 맞이하여 창간 이후 21세기 대한민국을 움직였던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14회에 걸쳐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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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 대다수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하면 이렇게 떠올린다.

이른바 잘나가는 세무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마다하고 인권변호사로, 지역 감정을 넘겠다며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버리고 출마해 낙선을 자초(?)한 것을 계기로 붙여진 별명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탄생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시 국민들은 나라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노 전 대통령은 소탈한 이미지 외에도 스스로 '시장 경제론자'라고 밝혔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공언이 국민들로부터 큰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 우선 그는 "재벌개혁을 하지 않으면 제2의 경제위기가 올 수 있다"며 재벌 개혁을 강조했다. 그 핵심 정책이 출자총액제한제 및 집단소송제 도입, 대기업집단 규제, 계열분리 조치 및 핵심역량집중 등 규제와 간섭을 통한 개혁이다. 당선 직후 사외이사제 확대 방침을 내세우면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재벌 개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참여정부의 재벌 개혁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크게 반성한다"고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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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혈 기울인 부동산 정책 실패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2003년 열린 제6회 국정과제 회의에서 "주거 문제는 새삼 설명할 필요 없이 중요한 문제"라며 "상황에 대한 대비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주택은 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에 집 때문에 고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늦지 않게 세우도록 합시다…(중략)"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부동산 정책은 참여정부 5년간 가장 실패한 정책으로 꼽힌다. 집권 초에는 전국 미분양 주택이 2003년 3월 2만3000여가구에 불과했지만 참여 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11만여가구로 약 4.7배 이상 증가했다. 또 5년 동안 수도권 신도시 집값이 56%, 전국 평균 집값은 36%나 뛰었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부동산 시장의 해법을 경제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소득 계층 간 갈등 구조로 파악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서울 강남권 등 일부 부유층을 향해 반 시장적 규제를 가했고 이는 결국 주변 집값마저 끌어올리는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수요가 몰리는 곳에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이 아닌 단순히 투기적 수요를 근절해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는 수요측면에서만 접근해 불씨를 키웠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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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정수도 건설과 한·미 FTA

노 전 대통령은 서울로 집중돼 있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지역 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국가 균형 발전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인천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충청권으로 수도 이전 공약을 내세운 것이 신행정 수도 건설의 발단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신행정 수도 건설 추진이 본격화됐다. 대통령 산하의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이 발족돼 정부는 본격적으로 수도 이전 계획에 착수한다. 관련 법 역시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노 전 대통령은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기도 했다. 진통 끝에 지난 2005년 3월 국회를 통과한 이 법은 충남 연기·공주 지역에 중앙 정부부처 9부 2처 2청, 16개 국책연구기관 등 이전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돼 현재 막바지 이전이 한창 진행 중이다.

노 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주도함으로써 지지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특히 FTA 독소 조항 논란의 불씨를 댕겼고 쌀 시장 개방에 대한 농민들의 항의 집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최소 30억달러 시장인 미국의 조선업 시장 진출은 포기하는 대신 5000만달러 시장(쌀 10만t 분량)인 한국의 쌀 시장은 지켰다.

■지역주의·권위주의 타파 공헌

노 전 대통령은 정치 일생을 통틀어 고질적인 지역주의 청산을 위한 노력은 물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했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데 노력했다.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임기 말인 2007년 10월 4일에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도 했다. 특히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분단 후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해 평양을 방문했다.

정상회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했다.

퇴임 후에는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간 그의 낙향의 꿈은 멀어졌다. 이 때문에 결국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면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이듬해 실시된 6.2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천안함 사태로 비롯된 '북풍(北風)'을 누르고 '노풍(盧風)'이 불면서 정치적으로는 '친노 세력' 부활의 신호탄이 돼 그 명맥이 정계에 이어져 오고 있다.

ssuccu@fnnews.com 김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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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마치고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로 낙향한 후 자건거에 손주를 태운 채 마을 길을 달리고 있다.


■商高 나온 변호사, 노풍으로 대통령까지… 자살로 生 마감

'상고 졸업→인권변호사→국회의원→장관→ 대통령→퇴임→낙향→자살'.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리(4㎞)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한 노 전 대통령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작은 회사에 취직했지만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1966년 10월 고졸 출신에게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세무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그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1971년 5월께부터다.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 뒤 1978년 변호사로 개업해 세무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로 탈바꿈한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인 부산의 '부림사건'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한 학생들의 상처를 보았고 외면하지 못했다.

1986년께부터는 변호사 업무에 손을 떼다시피 하고 운동에 전념하다 1987년 9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파업 중 거리시위를 나왔다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자 노동자들의 요청으로 진상 규명,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을 도왔다. 이것이 문제가 돼 노 전 대통령은 구속됐다가 23일 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지역 개업 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바보 노무현' 대통령 되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해 1988년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야권통합을 주도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됐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낙선하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역시 고배를 마셨다.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구에 출마하지 않고, 지역감정의 벽을 넘겠다며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이를 계기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정치적으로 큰힘을 얻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국민경선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중 국가균형발전을 강조하면서 행정도시, 혁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 먹겠다" "미국 응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퇴임과 함께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로 귀향했지만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김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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