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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취재파일] 매년 음력 5월 10일 내린다는 '태종우(太宗雨)', 과학적 근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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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은 태종(太宗)의 기신(忌辰)이다. 태종이 만년에 노쇠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 날씨가 오래 가물어서 내외의 거의 모든 산천에 두루 기우제를 올릴 정도였다. 상(上)이 이를 근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가무니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상이 승하하고 이어서 경기 일원에 큰비가 와서 마침내 풍년이 들었다. 이후로 매년 이날에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태종우라고 하였다.’ (이유원, <임하필기(林下筆記)> 중에서)
* 기신(忌辰) : 기일(忌日)의 높임말

매년 음력 5월 10일이면 어김없이 내린다는 ‘태종우(太宗雨)’는 문헌상으로는 성종 때의 선비 이행(李荇)의 <용재집(容齋集)>에 처음 나타납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태종우에 대한 언급이 있고, 영조 재위 40년인 1764년 음력 5월 10일에도 비가 내리자 영조가 ‘이는 선조들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민간전승입니다.
‘일본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던, 임진왜란을 한 해 앞둔 1591년에는 태종이 승하한 1419년 이후 무려 172년 만에 처음으로 음력 5월 10일에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만 정말로 172년간 매년 음력 5월 10일에 비가 왔는지는 관측 기록이 부족해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매년 음력 5월 10일에는 비가 내린다는 걸까요? ‘태종 임금이 하늘에 올라가서 뿌리는 거다’는 설명도 좋겠지만, 문제를 좀 더 과학적으로 들여다봅시다. 지금까지 기존의 가장 흔한 설명은 ‘음력 5월 10일이 장마철이기 때문에 사실 태종우는 당연한 자연현상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설명이 맞는 걸까요? 아래 표를 보면서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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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서 보듯 2000년부터 올해까지 총 15년 가운데 실제로 음력 5월 10일에 비가 온 해는 단 6회에 불과합니다. 단순 확률로는 40%입니다. 2005년과 2010년, 2011년은 기록상으로는 서울에 비가 왔지만, 강수량이 ‘0.0mm’로 빗방울이 지면을 살짝 적시는 정도에 불과해 실제 강수 기록에서는 제외했습니다.
이 최근 기록을 보면 ‘태종우’는 오히려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토요일인 어제(7일)도 음력 5월 10일이었지만, 아시다시피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 지방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40%에 불과한 최근의 강수확률을 보고 있으면 조선 초기에 약 172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태종우가 내렸다는 기록을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

다음으로 실제로 태종우가 장마 기간에 내렸던 건지 간단히 확인해 보았습니다. 위의 표에 나타난 2000년 이후의 음력 5월 10일은 매년 날짜가 바뀌지만, 평균 잡아 6월 16일(정확히는 16.2일) 전후입니다. 범위를 과거로 더 넓히더라도 이 값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의 장마 시작일은 이보다 더 늦습니다. 기상청은 최근 장마 시작일이 평균적으로 6월 24일에서 25일 정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태종우는 장맛비가 아니라, 실제로는 장마 시작보다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더 일찍 내리는 비인 셈입니다. 그럼 태종우는 애초부터 근거 없는 야담에 불과했던 걸까요?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온난화로 인해 장마철이 짧아졌을 가능성입니다. 최근 기후 변화 패턴은 장마 기간은 점점 짧아지고, 장마 기간 중 내리는 강수량은 더 많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집중호우가 쏟아지지만, 1년 전체 강수량도 함께 늘어나면서 강수 집중도만은 반대로 낮아지는 경향입니다.

게다가 과거 1940~1980년대의 장마철은 지금과 또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이 때의 통계를 살펴보면 6월 24일이 장마 시작일 중 가장 높은 빈도로 나타나지만, 그 다음 높은 빈도의 장마 시작일은 6월 15일입니다. 바로 태종우가 내린다는 음력 5월 10일 즈음입니다. 결국 20세기 중반만 해도 장마의 시작이 지금보다 더 빨랐고, 이 날짜가 조금씩 뒤로 늦춰지면서 최근 들어서는 전체 장마 기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남극의 빙하 코어를 채취해 긴 시간에 걸친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15세기의 지구는 ‘중세 온난기’를 지나면서 상대적으로 기온이 따뜻했고 농업 생산이 활발했다고 말합니다. 15세기의 우리나라는 태종 - 세종대를 거쳐 9대 성종까지의 시기로, 그야말로 조선왕조의 국력이 가장 강했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반대로 18세기의 소빙하기에는 기온이 급강하해 기근과 아사가 전 세계적으로 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민란이 빈발했던 시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았던 15세기도 최근의 온난화에 비하면 오히려 ‘훨씬 시원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따라서 15세기 조선의 장마 시작 기간도 지금보다 더 길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15세기에는 정말로 음력 5월 10일을 전후해 많은 비가 내렸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닐까요.

온난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24절기가 실제 날씨와 점점 맞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름이 길어지고, 집중호우는 늘어나고, 태풍은 강해졌습니다. 태종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경향은 점점 더 눈에 띄게 두드러질 것으로 보입니다. 장마철이란 개념 대신 아예 ‘우기’라는 용어를 도입하자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24절기와 태종우를 놓고 ‘맞다’ ‘안 맞다’를 논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엽 기자 scien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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