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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미국 역사에서 발견한 ‘전쟁병’…첫번째 원죄는 노예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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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도서관마다 ‘전쟁 연구서’ 가득

역대 미국 대통령 모두 ‘전쟁 수행’

‘인디언 정복 원죄’ 군사주의 파생

‘흑인노예 노역 원죄’ 인종차별 조장

“미국 정신문화 뿌리로 고착된 상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등 영향

남북전쟁으로 노예해방 됐다지만…

백인우월주의 낳아 유색인종 비하로

마틴 루서 킹 ‘흑인인권운동’ 감동적

‘인종차별 수정조처’ 흑인 입학 우대

1971년 남부 명문 조지아대 부임

2천명 교수 가운데 유일한 ‘유색인종’

‘남부 특유 친절함’에 숨은 차별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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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에 평화를 공부하러 왔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전쟁을 체험해야만 했다. 대학도서관을 아무리 뒤져도 내가 찾는 평화 연구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전쟁 연구서만 가득했다. 시선을 미국의 역사로 돌려봤다. 놀랍게도 미국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전쟁을 수행하지 않은 대통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미국 전쟁의 역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평화 공부를 유보하고 미국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인 까닭을 찾아봤다. 그런데 미국이 수행한 전쟁을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내가 찾는 까닭을 명쾌하게 제시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미국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내가 독자적인 연구 끝에 찾은 ‘전쟁병’의 궁극적 원인은 미국의 ‘원죄’였다. 주지하듯 기독교 신학에서 원죄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짓게 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의미한다. 내가 볼 때 미국의 원죄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흑인 노예제도를 운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디언(북미 원주민)의 삶의 터전을 무력으로 강탈한 것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원죄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는커녕 원죄의 유산은 미국의 정신문화 전역에 확산되어 고착되었다. 노예제도로부터 작금의 인종주의가 파생되었고, 인디언 정복으로부터 작금의 군사주의가 파생되었다. 그리고 그 양자가 결합해서 미국의 전쟁을 끊임없이 조장하고 있다. 그 전쟁병은 이미 치유가 불가능한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내가 내린 결론은 미국의 원죄를 이해하지 못하면 미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장사꾼들은 16~17세기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약 500만명을 미국 농부들에게 노예로 팔았다. 가장 선호하는 노예는 20대 중반의 흑인 남성으로 한명에 약 1200달러에 팔렸다. 그다음 선호하는 노예는 임신 가능한 흑인 여성이었다. 그들 가임 여성은 대부분 백인 주인의 자녀를 낳았다. 백인의 피가 섞인 흑인 노예는 더욱 고가로 팔렸다.

약 400만명의 흑인 노예가 디프사우스(조지아, 남북 캐롤라이나,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등)로 팔려갔고, 약 100만명의 흑인 노예는 미국 전역에 팔려갔다. 디프사우스에서 흑인 노예들은 주로 목화밭에서 일했다. ‘노동 쿼터’가 존재했다. 남성 노예는 하루에 80파운드의 목화를, 여성 노예는 하루에 70파운드의 목화를 따야 했다. 쿼터를 채우지 못하면 등에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당했다. 디프사우스에서 수확한 목화는 주로 영국으로 팔렸다. 그 시대 영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섬유산업의 메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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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흑인 노예는 4년간에 걸친 남북전쟁(1860~64)을 계기로 해방되었다. 남북전쟁은 북부와 남부 간의 대조적인 문화, 상이한 이해관계 등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북부는 상공업 사회였고, 노예해방을 옹호했고, 연방정부를 지지했고,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흥행했다. 그 반면 남부는 농업 사회였고, 노예해방을 반대했고, 주정부를 지지했고, 침례교회를 선호했다. 특히 노예제도의 참상을 폭로한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남북전쟁을 촉발시킨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남북전쟁은 노예를 해방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남북 간 대립의 골을 더욱 심화시키고, 백인 우월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백인은 이른바 ‘스리디(3D) 업종’에서 일하기를 싫어한다. 미국에서 3D 업종이란 위험하고(데인저러스), 더럽고(더티), 품위가 떨어지는(디미닝) 일을 의미한다. 남북전쟁 이전까지 주로 흑인 노예가 담당했던 노동이다. 노예해방 이후에는 점차 멕시칸, 라티노, 아시아인 등과 같은 유색인종이 3D 업종에 종사했다. 그런 추세에 따라 흑인 인종차별은 모든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백인 우월주의로 점차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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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에서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마틴 루서 킹(1929~68)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을 꼽을 수 있다. 나는 킹 목사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의 저술을 읽으면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39살의 짧은 삶을 산 사람의 글이 어떻게 그처럼 심원한 진리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킹 목사의 저술을 읽을 때마다 신의 음성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킹 목사의 생일을 미국 국경일로 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0년 마침내 미국 50개 주 모두가 레이건의 행정명령을 수용했다. 미국에서 개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한 사례는 조지 워싱턴과 마틴 루서 킹 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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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하나의 노력으로는 ‘인종차별 수정조처’(Affirmative Action)를 꼽을 수 있다. 이는 각 대학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흑인의 입학 조건을 다소 완화시켜 주는 제도다. 그러자 백인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예컨대 1978년 앨런 바키라는 학생은 인종차별 수정조처 때문에 자신이 지원한 캘리포니아대(데이비스 캠퍼스) 의과대학에서 탈락하자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이 소송은 연방 대법원에서 바키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자 하버드대에 지원했다가 탈락한 아시아 출신의 많은 학생들도 인종차별 수정조처에 근거해서 대학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법원은 하버드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인종차별 수정조처는 이전에 노예 생활을 했던 흑인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타당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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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보다 흑인 인권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흑인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존재한다. 내가 디프사우스에 속하는 조지아주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까닭 중 하나는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몸소 체험하면서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 북부에 위치한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1971년 나는 남부에 위치한 조지아대학에 교수로 부임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가족과 함께 중고차에 세간살이를 가득 싣고서 북부에서 남부로 가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남부 접경지대에 도착할 즈음 자동차의 기름이 떨어져갔다. 마침 눈앞에 보이는 주유소에 차를 댔다. 그런데 직원이 흘끔 쳐다보더니 내 차를 발로 차면서 기름을 줄 수 없다고 소리쳤다. 나는 차창을 열고 말했다. “내 얼굴이 양키처럼 보입니까?” 미국에서 양키는 북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자 직원은 급히 미안하다면서 기름을 넣기 시작했다. 내 차는 아직 미네소타주에서 발급한 표지판을 달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남부와 북부 간의 적대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침내 조지아대학이 있는 애선스에 도착했지만 날이 너무 어두워 계약한 집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마침 24시간 운영하는 맥도널드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경찰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조지아대학 교수로 부임했는데 초행길에 날이 어두워서 그러니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음료수를 들이켠 다음 아주 친절한 태도로 따라오라고 그랬다. 우리 가족은 경찰 오토바이 두 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애선스에 입성했다. 안내하는 경찰 오토바이의 뒤를 무심코 바라보는데 ‘4·19’ 때 경찰 총격을 당했던 체험이 떠오르면서 묘한 대조가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아하, ‘남부의 친절함’(southern hospitality)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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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대는 1785년에 설립된 미국 최초의 주립대학으로서 현재 남동부의 명문대학으로 평가된다. 그때 조지아대의 약 2천명 교수 중에서 나는 유일한 유색인종이었다. 백인 교수들은 내 앞을 지나가면서 신기한 듯 흘끔흘끔 쳐다봤다. 나는 그럴 때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백인 교수들은 내게 비교적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양보도 많이 해주었다. 예컨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먼저 들어가라고 한다든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들은 돈 문제 앞에서는 철저히 인색한 태도로 돌변했다.

내가 대학원에서 지도하는 학생 중에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워서 하버드대 출신의 백인 원로 교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성적이 영 시원치 않았다. 하루는 그를 불러서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백인 교수가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도저히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학생 장학금을 심사하는 교수회의가 열렸다. 심사위원들은 내 학생의 성적을 잠깐 확인하더니 심사 대상에서 탈락시켜 버렸다. 나는 내 학생을 고용한 백인 교수에게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내 학생이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어 힘들어하니 배려해 달라고 그랬다. 그러자 그 교수는 곧바로 내 학생을 사랑한다고 답변했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외쳤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 알겠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당신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때 나는 테뉴어(종신교수)를 받지 않은 상태였고, 그 백인 교수는 나를 파면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학생에 대한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참을 수가 없었다.

조지아대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강의실 청소는 모두 흑인이 했다. 청소 현장에 백인은 딱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서 흑인이 청소할 강의실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조지아대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받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했다. 교수는 보통 2~3과목을 가르친다. 하지만 나는 미국정부론, 국제정치학, 비교정치론, 정치발전론, 아시아정치론, 인권정책, 정치학방법론 등을 가르쳤다. 글로비스(GLOBIS·글로벌이슈연구센터)를 창설해서 학생들의 국제적 안목을 키우는 데도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뒤섞여 공부를 한다. 정부도 그것을 권장한다. 군대도 정부 정책에 따라 흑인과 백인이 많이 뒤섞여 운영된다. 그러나 자발적 결사체인 교회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흑인교회와 백인교회가 철저히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흑인과 백인 간의 심리적 거리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내 친구가 잘 아는 피보디음악대학의 흑인 교수가 있다.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어느 날 그는 강의시간에 늦을 것 같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인 경찰이 그를 쫓아와 체포했다. 청천대낮이었지만 뛰어가는 흑인은 수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그를 대학에 끌고 가서 교수 신분을 확인하고서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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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어하우스대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다. 모어하우스대는 애틀랜타 소재 흑인 남성 대학으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교로 유명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절(2009~16) 미국에서 흑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는지를 물어봤다. 그러자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답변했다. 학생들은 밤이 되면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못한다고 했다. 백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하면서 총을 쏘거나 괜한 시비를 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모친은 백인이었다. 오바마가 킹 목사처럼 흑인 인권운동을 했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의 사고방식은 사실상 백인의 사고방식과 유사했다.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마침내 미국에 ‘탈인종주의’(post-racism)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이 미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론에 불과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볼 때 인종주의는 여전히 미국의 원죄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바마 이후 대통령에 출마한 트럼프는 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당선되었다. 오바마에 내심 적대감을 갖고 있던 백인들이 대거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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