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2 (수)

[시론] 블랙리스트, 당신들의 꿀단지는 깨졌다 / 황규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황규관
시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후보자 시절 청문회에서 문체부 산하 기관장의 임기 문제에 대해 “법으로 보장돼 있는 건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 듯 보인다. 다만 그 진상을 밝혀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공언했듯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진상조사위원의 면면과 장관의 의지를 보건대, 우리는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해도 좋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도 장관이 사태를 보는 시각의 복잡성이다. 도 장관은 7월27일치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에 관계된 공무원들이 예술인들이 보기에는 가해자이지만 본인들 입장에서는 부당한 지시에 의한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실체적 진실”을 찾겠다고 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실체적 진실”에 일보 더 접근할 수 있다.

현실 정치권이나 행정관료 세계의 메커니즘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방어하고 은폐하려는 장치가 작동하리라는 것쯤은 경험상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도 장관의 의지대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면 그 방어, 은폐 장치부터 해체시켜야 옳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예술정책을 총괄적으로 책임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박명진 위원장이 블랙리스트를 운영한 의혹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데 이어 위증죄로 기소까지 된 마당에 사무처장이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방어, 은폐 장치가 작동될 것이란 우려를 갖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민간위원회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사무처장이다. 상징적 책임자인 위원장이 재판을 받고 있는데 실무를 총괄한 사무처장에게 과오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없다고 한대도 과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출판계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을 사퇴시키라고 도 장관에게 요구한 적이 있다. 그동안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세종도서 선정 시 실제적으로 블랙리스트를 가동시킨 기관이며, 출판계의 주장에 따르면, 현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직무적 무능에 더해 측근 인사들의 사업을 지원했다. 또 한국문학번역원은 해외 대학의 한국문학 관련 사업에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으로 훗날 알려진) 한 시인이 관계돼 있다고 배제한 의혹을 받았다. 당연히 한국문학번역원도 블랙리스트 운영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의혹 자체가 모두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박근혜 정권이라는 배경을 고려하면 그런 의혹들에 상당한 무게가 실린다. 길게 설명할 형편이 안 되지만, 대선캠프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으로 활동했던 예술인복지재단 대표를 향한 눈초리는 더욱 싸늘하다.

정권에 상관없이 각 분야에서 실무를 총괄해야 하는 기관장들의 임기는 보장되어야 맞다. 그런데 이 명제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실무를 맡은 기관장들은 정권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일 처리를 상식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일을 단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해왔다면 이제는 최소한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꿀단지의 꿀은 떨어졌다. 상황이 이런데도 또 다른 욕심을 낸다면 그것은 낯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그 꿀단지는 꿀단지의 원래 주인들이 지난겨울 내내 항쟁을 통해 엎어버린 꿀단지이다. “실체적 진실”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계속 몰염치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돌려줄 것은 ‘불명예’뿐이다. 개혁은 방법부터가 개혁적이어야 한다.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 페이스북] [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