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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106년 전 오늘… "매국노 반역행위로 일제식민지화 완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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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이완용, 강제 한일병합안 가결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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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한일병합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다. 106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치적은 역사적으로 비판받고 있다/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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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주요 경제적 후원자. 독립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 형조 참판과 총리대신을 지낸 조선의 '인재'.

그는 다름아닌 '나라팔아 먹은 인물'로 익숙한 이완용이다. 106년 전인 1910년 오늘(8월22일) 이완용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강제병합안'을 성사시켰다. 사실상 한국이 일본 '식민지'로 종속된 날이기도 하다. 이날을 두고 경술년 해에 일어나는 나라의 치욕이라는 뜻에서 '경술국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이날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을 가결시켰다. 명목은 번지르르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그는 '대한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 한일병합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같은 날 오후 이완용은 한일병합과 관련한 전권을 위임받고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과 8개 조문에 합의했다. 이 조항은 일주일 뒤인 8월29일까지 극비로 부쳐졌다.

이완용은 끝까지 '대한제국을 위해 한일병합은 필요하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하지만 한일병합 조문 내용을 보면 그의 변명이 민망해진다.

8개 조문의 주요 내용에는 △대한제국 황제폐하는 일본 황제폐하에 통치권 영구 위탁 △일본 황제폐하는 대한제국 왕실의 품위유지를 위한 충분한 세비 공급 약속△일본 황제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에게 영작을 수여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한인의 신체와 재산 보호 및 복리 증진 △한인 중 자격이 있는 자 한국에서 제국관리로 등용 등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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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독립문 현판을 직접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독립문은 독립협회에서 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의미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따 지었다/사진=위키피디아


이완용 스스로 조국의 주권과 영토권 등을 일본에게 자발적으로 넘겨준 셈이다. 절차도 '날림'이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합의서에 대한국새를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 왕실에서 행정용 결제에 사용했던 칙명지보를 사용했다.

이는 고종황제 시절 일본이 빼앗은 것이다. 순종황제의 국새도 서명은 이 합의서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훗날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한일병합 무효화 논쟁을 벌일 때 주요한 논쟁점이 된다.

일본의 35년간의 식민 지배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꿔놨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에서 타지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스무살도 안된 어린 소녀들은 강제로 성노예 생활을 했다.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사람들의 희생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완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의호식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몇 안되는 특권층이었고 여의도 면적의 2배에 달하는 땅을 보유하기도 했다. 이 땅 중 현재 국고에 환수된 땅은 0.09%에 불과하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고조되고 있을 무렵인 1926년 국민들의 원망을 안은 채 생을 마감했다.

이미영 기자 myle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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