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월 3일 오후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의혹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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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 작업은 있었지만 그 자체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 합병이나 승계 과정 및 절차에서도 불법 행위가 없었다.”(서울고등법원)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제기된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회장이 지난 2월3일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뇌물 제공을 인정한 2019년 대법원 판단과는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2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은 뇌물 제공의 불법성을 인정했을 뿐, 합병 과정의 위법성까지 판단하지 않았다”라고 판시했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8월 서울행정법원은 금융감독원의 삼성바이오로직스 부당회계 처리에 대한 임원 징계에 대해 징계 취소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지배력 상실의 회계 변경의 재량권 남용은 물론, “자본잠식 회피가 주된 목적이었으며, 원칙 중심 회계기준을 위반했다”라는 판단을 남겼다. 이에 대해 2심 재판부는 “동일 행위가 회계 기준 위반일 수 있으나, 형사처벌을 위한 고의성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동일 사안에 대해 소송의 종류와 법원에 따라 다른 판결이 나온 셈이다. 이 혼돈이 10년 이상 지속됐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 총수의 ‘사법리스크’로 높아진 의사결정의 불확실성이 오늘날 삼성 위기로 이어졌다는 진단도 내놓는다. 심지어 의사결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미래전략실’(옛 회장 비서실)과 같은 컨트롤타워가 재건돼야 한다는 주장도 뒤따른다. 번수를 잘못 짚은 분석이고 처방이다. 기업 경영의 사법적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나의 처방은 이렇다.
지난 2023년 6월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의 회장·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김병준 당시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베트남 하노이 한 호텔에서 열린 동행 경제인 만찬 간담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격려사에 박수치고 있다.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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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중심 규제로의 패러다임 전환
첫째, ‘규칙 중심’(rule-based)에서 ‘원칙 중심’(principle-based)으로의 규제 패러다임 전환이다. 자본거래의 핵심 이슈는 기업 가치 평가다. 시가가 있는 상장사의 가치 산정 방식은 자본시장법 시행령에 규정돼 있다. 1998년 합병비율을 제멋대로 정해서 사익추구를 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도입된 규칙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오늘날 부작용을 낳고 있다. 시행령에 따라 평가한 기업가치로 합병비율을 정하면 규칙을 준수했기에 면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삼성 합병 무죄 판결은 규칙 중심 규제가 기업의 실질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을 잘 보여준 예다.
최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상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며 자본시장법 등을 개정하여 문제점을 개선하겠다는 주장의 허점은 여기에 있다. 인적분할, 물적분할 및 합병 등 자본거래를 통한 회사 개편은 매우 다양한 방식이 있으며, 지금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이 현재도 개발되고 있다. 이런 방안을 미리 예상하고 법령(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만들 수 있을까? 새로운 형태의 거래가 있을 때 이를 구속하는 법령이 없으면 일반주주의 피해를 구제할 길이 없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이 일찌감치 원칙 중심 규제로 돌아선 까닭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합병의 실질적 공정성’을 요구하며, 판례를 통해 재무적 공정성(fair price)과 공정한 절차(fair dealing)의 이중 기준을 명확히 하고 있다. 2024년 테슬라-솔라시티 합병 소송에서 법원은 시가 대비 300% 프리미엄 인수가 실질적 공정성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이 그 예이다. 영국 금융감독청은 합병비율이 ‘모든 이해관계자의 공정한 대우’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구체적 수치보다는 목적 준수 여부를 따지는 셈이다. 일본 금융청도 2019년 종합적 기업가치 평가 가이드라인을 도입해 시가·현금흐름할인법(DCF)·상대평가 등 다중 지표 활용을 권장하며, 합병비율 산정 시 이사회의 설명의무를 강화했다. 이에 따라 2023년 소프트뱅크-암(ARM) 합병 시 기술력과 시장점유율을 가치 평가에 반영했다. 합병 과정에서 기업 가치 평가는 당사자 간 합의가 최우선이고 그 합의 ‘원칙’을 규제당국이 제시하고 사법부는 그 원칙 준수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 원칙 중심 규제 체제로의 전환은 동일 사안에 대해 각급 법원이 다른 판결을 하는 혼선을 방지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형법상 배임죄는 없애야…증거개시절차 도입 필요
둘째, 배임죄를 형사소송이 아닌 민사소송으로 다루고, 증거개시절차(Discovery) 등을 도입해야 한다. 형법상 배임죄는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형사상 배임죄로 처벌되는 사례가 많았다. 경영판단을 사후적으로 ‘고의성’을 추론해 형사처벌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2003년 한화그룹 부실 계열사 지원 사건에서 대법원은 “경제위기 상황에서의 동반 부도 방지 의도”를 인정하지 않고 형사책임을 물었다. 이사 또는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범죄로 다뤄지면 기업가정신은 위축된다. 미국 법원은 비전문가인 법원이 기업 경영 판단을 사후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주의의무를 다한 경영 판단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는 경영판단원칙을 갖고 있다.
배임죄를 민사소송으로 전환하여 기업의 의사결정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도 보완이 필수적이다. 증거개시절차 도입이다. 원고인 주주 등이 회사나 경영진에 대해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데 정보의 비대칭으로 피해를 입증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지금껏 민사소송에서 검찰의 배임죄 소추에서 발견된 근거에 의존하는 이유다. 증거개시절차가 도입되면 민사소송을 제기한 주주들이 이 제도를 통해 손해 입증이 한결 수월해진다.
이미 증거개시절차 도입을 위한 사전 준비는 상당부분 진척된 상황이다. 대한변협과 국회입법조사처가 2022년 10월부터 1년간 공동연구를 통해 민사소송법 개정안 초안(소 제기 전 증거조사 절차 신설, 제재 규정 강화 등)이 제출됐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2024년 신년사에서 법원의 재판 부담 경감과 소송의 선진화를 위해 적극 도입을 주장한 바 있다.
컨트롤타워 부활이 아니라 이사회 강화가 정도
셋째, 이사회 기능 강화가 필요하다. 사법리스크에 따른 의사결정 지연을 방지하기 위해 컨트롤타워를 도입하는 것은 IMF 위기 이후 거버넌스, 즉 지배구조 개선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IMF 위기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회사의 이사와 경영진이 그룹 총수의 의사에 따라 사업성을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동반 부실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의 거버넌스 개선의 중요한 흐름은,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을 이사회가 주도하여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총수 한 명에 주요한 의사 결정을 맡기는 건 그 자체로 위험을 높이는 일이다. 티에스엠시(TSMC)와 엔비디아 등 세계적 기업이 특정 한 사람에 의존하는가? 이 회사들의 이사회는 구성이 매우 다양하며 독립적으로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다. 이사회와 집행임원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고 집행임원의 과제를 명확히 제시한다. 이사회의 주요 역할은 목표 설정, 평가, 보상 체계 구축이다. 평가를 위해서는 과제를 명확하게 주어야 한다. 위임의 범위와 한계를 정하고, 이에 따라 책임을 묻도록 하는 것이다. 회사가 투자할 자산 중 얼마를 기존 제품의 고도화에 활용하고 나머지 얼마를 새로운 미래를 위해 투입할 것인지를 정해줘야 한다.
평가를 통한 보상체계 구축 또한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보상체계 구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의 중장기 가치 증가 변화와 임직원의 목표 일치다. 이를 위해 총수를 제외한 임직원에 대해 양도제한주식(RSU: Resticted Stock Unit) 등 주식보상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기업 총수는 회사의 지배자가 아니며 지분을 많이 갖고 있는 주주 중 한 명이다.
이용우 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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