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전 동회천 4·3희생자 위령제 현장
초토화작전에 중산간 마을 전소·인명피해 ‘막심’
마을마다 위령제로 희생자 위로하는 시간 가져
2일 오전 11시 제주시 동회천 마을의 4·3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박미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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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전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자가 불법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불법 계엄령에 따라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 지르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비무장 주민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했습니다. 얼마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을까요. 당신들의 죽음보다 어린 자식과 가족을 남겨두고 가는 고통이 더 커 쉽게 눈을 감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가슴 속에 맺힌 한 내려놓으시고 영면하시기를 바랍니다”.
2일 오전 11시 제주시 동회천 마을의 4·3 희생자 위령비 앞. 동회천 마을의 희생자 72명을 일일이 불러 넋을 위로하는 불교식 제례에 이어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추도사로 유족을 위로했다.
매년 정부의 ‘4·3희생자 추념식’을 하루 앞두고 동회천 마을에서 위령제가 열린다. 4·3 당시 주민의 절반 이상이 희생됐고, 마을이 깡그리 불 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탓이다.
이날 동회천 위령제에 앞서 도련1동에서도 위령제가 열렸다. 현재 16곳의 마을에서 매년 자체 위령제를 열고 희생된 주민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올해 동회천 위령제에는 유족과 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김순건 동회천 4·3희생자 유족회장(83)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살다가 60년이 지난 2007년에야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하기 시작했다”면서 “한 집당 한명 꼴로 죽거나 잡혀가 행방불명됐다”고 말했다. 현재도 노인이 대부분인 동회천 마을의 절반이 유족이다.
김 유족회장과 어르신들은 기억을 더듬으며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풀어냈다. “당시 종이가 귀했다. 좀 어리숙했던 형이 뭔지도 모른 채 삐라 종이를 담배 마는 데 쓰려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경찰한테 걸렸다. 총살 당한 게 바로 여기 이 회관 마당이다. 삥이(삘기) 뽑아 먹으러 뛰어다니던 봄에 울리던 총소리를 기억한다. 우리 동네 첫 희생자였다고 했다”.
김 유족회장 역시 당시 26살의 젊은 아버지를 잃었다. “농사짓는 평범한 분이었다. 내려오면 전부 풀어준다고 하길래 가셨다가 결국 박성내에서 총살당하고 불태워졌다. 군이 시신을 불태워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그나마 아버지는 아래 깔려 계신 덕분에 옷이 그대로여서 어머님이 모셔올 수 있었다고 했다”.
‘박성내 사건’은 토벌대가 1948년 12월21일 조천면 관내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속인 후 찾아온 150여명을 박성내라는 냇가로 끌고 가 학살한 사건이다. 토벌에 따라갈 사람은 차에 타라고 한 후 10명씩 줄줄이 엮어 하천 변에서 총살하고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지난 3월27일 만난 김순건 동회천 4·3희생자 유족회장이 동회천 4·3위령비를 가리키며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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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유족회장은 제주시 중심부에 위치한 ‘박성내’를 지날 때면 여전히 힘겹다. “내 나이 스물여섯이 되니 ‘우리 아버지가 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구나’라는 생각에 기가 막히고 환장하겠더라.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딨나’ 할 정도로 억울했다. 고생도 많이 했다. 죽기 전에 이 한을 다 못풀 것 같은데, 이야기라도 들어주는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4·3 당시 동회천 뿐만 아니라 한라산과 인접한 도 전역의 중산간 마을 대부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회천(동회천+서회천) 130명을 비롯해 주변 마을인 와흘 135명, 대흘 134명, 선흘 221명, 봉개 273명, 용강 138명, 도련 187명 등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는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중산간 마을을 대상으로 이뤄진 대규모 강경진압작전인 초토화 작전 때문이다. 무장세력이 숨어있는 한라산과 인접했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을 쓸어버리고, 그들의 은신처와 보급처를 없애 궤멸시킨다는 작전이었다. 1948년 11월17일에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군경은 소개령을 내려 주민을 강제로 해변마을로 이주시키고 집단 살상했으며, 마을을 불 태웠다. 4·3 전개과정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시기다.
7년여간 진행된 4·3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중 80%가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6개월동안에 집중됐다.
김창범 제주4·3유족회 회장은 “4·3이 진실과 정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면서 “무엇보다 국가폭력에 의한 4·3과 같은 참혹한 역사가 이 땅 위에서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미라 기자 mr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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