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更年期)는 누구나 마주하는 인생의 전환점이다. 한자 '갱(更)'이 뜻하듯 이 시기는 단순한 나이의 변화가 아닌 '다시' '고침'의 시간이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몸과 마음, 관계의 변화를 품격 있게 재정비하며 나를 새롭게 그려갈 수 있다.
40대 후반이나 50대에 접어들며 신체적·심리적 변화가 찾아온다. 밤에 땀으로 잠에서 깨어 이불을 걷어차거나 아침에 거울 앞에서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여성은 에스트로겐이 줄며 얼굴이 달아오르고,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저하로 무기력감과 피로를 느낀다. 낯설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생리적 순리다. 중요한 건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품격 있는 새 일상을 다시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갱년기를 '쇠퇴'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 시기의 변화가 호르몬과 뇌 화학의 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이해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나만 힘든가?" "성격이 변했나?" 하는 자책은 혼란만 더한다. 50대 초반 영숙 씨는 회의 중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당황했지만 동료들이 건네는 "나도 그래"라는 말에 위로받았다. 48세 민수 씨는 만성 피로를 게으름 탓으로 돌리다가 병원에서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확인하고 적절한 근력 운동과 치료를 통해 활력을 되찾았다.
갱년기는 결코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피로, 두근거림, 열감 같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대충 넘기지 말자. 단순 갱년기 증상이라도 그에 맞는 돌봄은 꼭 필요한 법. 47세 혜진 씨는 막연히 이른 갱년기라 여겼던 증상이 갑상샘 문제였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 후 컨디션을 되찾았다. 미심쩍은 변화는 일단 관찰하고 확인하자. 갱년기든 다른 질환이든 낙인보다는 '흔들리는 경계'를 다듬는 구체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관계 속 경계도 중요하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라는 말은 이기적인 게 아니다. 한 부부는 토요일 오후 각자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를 나눈다. "아, 우리 엄마 못 이겨요"라며 투덜대는 중학생 소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이 부딪치면 엄마의 내공이 더 세다. 그만큼 이 시기의 에너지는 결코 약하지 않다. 날뛰는 망아지를 길들이듯 스스로 홀로 있는 시간의 경계를 통해 균형을 찾아야 관계도 지킨다.
줄어드는 호르몬만 아쉬워하기엔 남은 시간이 아깝다. 갱년기는 혼란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로운 나를 일궈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호르몬 너머의 '내적 파워'를 끌어내보자.
[성유미 정신분석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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