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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이 기각됐다. 7:1, 한덕수의 완승이었다. 그는 곧바로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에 복귀했다.
한덕수 탄핵 사유는 총 5가지였다. ‘국회가 정한 헌법재판관 3명을 임명하지 않은 부작위 책임’이 최대 쟁점이었다. 8명 헌법재판관 중 4명(문형배, 이미선, 김형두, 정정미)만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가 위헌, 위법이라고 봤다. 다만 파면 사유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던 탄핵 사유는 따로 있었다. ‘비상계엄 국무회의 개최 등 묵인·방조 책임’이다. 최고위 공직자인 국무총리로서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을 막지 못한 죄가 크다고 봤다. 법적 책임은 따져봐야겠지만,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헌재)의 판단은 달랐다. “국무회의 소집 건의 등 적극적 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했다.
위헌적 비상계엄, 국무위원은 책임이 없나
헌재 결정으로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는 비상계엄 책임에서 일단 벗어나게 됐다. 덩달아 비상계엄 당일 대통령실에 집결한 국무위원들도 책임을 벗을 수 있게 됐다. 대통령이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저지른 비상계엄을 눈앞에 보고도 막지 못했는데도, 일단 아무 책임이 없게 됐다.
한덕수 탄핵 기각 결정을 보며 나는 독재자 전두환이 떠올랐다. 전두환이 주도했던, 5·18 광주학살의 신호탄이 된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떠올랐다. 당시 6명 국무위원들이 서명한 대통령 공고문이 떠올랐다.
신현확 국무총리, 이한빈 경제기획원장관, 박동진 외무부장관, 김종환 내무부장관, 김원기 재무부장관, 백상기 법무부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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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이 벌어지고 16년이 지난 1996년 8월 26일, ‘전두환 쿠데타’에 대한 첫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다. 법원은 12.12, 5·18 군사쿠데타에 책임을 물어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징역 22년 6월 형을 선고했다.(2심에서 감형) 이 둘을 포함해 총 15명의 권력자가 유죄를 선고받았다. 정호용, 장세동, 허화평 등 대부분 전두환이 이끌던 신군부(하나회) 인사들이었다.
재판부는 신군부측이 비록 5.17 비상계엄 확대를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의 재가를 거치는 형식을 빌렸지만 이를 기화로 정치인을 체포하는 등 위협적인 상태를 계속 유지한 만큼 국헌문란 목적의 폭동이라고 밝혔다.하지만 폭동으로 평가받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동의하고 서명한 국무위원은 이후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 동아일보 (1996.8.27.)
문득 궁금해졌다. 폭동을 승인한 ‘전두환 국무위원’들이 5.17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12·3 내란을 방조한 ‘윤석열 국무위원’들의 삶을 미리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란이 벌어지고 3개월여,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형사처벌 절차가 진행중인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있는 ‘윤석열 국무위원’들의 미래가 궁금해서다.
신현확, 이한빈, 박동진, 김종환, 김원기, 백상기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결정한 국무회의를 주재했던 국무총리 신현확은 총리에서 물러난 뒤 전두환 정권에 부역했다. 5공화국 헌법 개정을 주도(헌법개정심의위원장)했고, 전두환의 국정자문위원(1981년)을 지냈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삼성물산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국민대학교를 운영하는 국민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영삼 정부 때는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1993년)을 지냈다. 2007년 4월 사망했다. 향년 86세.
이한빈 경제기획원장관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직후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아주대학교 특임교수, 과학기술원 이사장,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민주화합 추진위원회 위원, 통신개발 연구원 이사장, 국제민간 경제협의회 회장, 한국인간개발연구원 회장,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이사장, 자유지성 300인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2004년 1월 사망했다. 향년 77세.
박동진 외무부장관도 5.17 직후 장관에서 물러났다. 이후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재선)을 지냈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거쳐 노태우 정부에서 주미대사, 한국전력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한국외교협회 회장이 됐다. 2013년 11월 사망했다. 향년 91세.
김원기 재무부장관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1980년), 국보위원(1980년), 한국무역협회 회장(1980년)을 지냈다. 공직을 나온 뒤엔 쌍용그룹 상임고문(1983년), 한국도로공사 이사장(1984~1986년), 국민대학교 이사장(1989년)을 역임했다. 2001년 사망했다. 향년 76세.
백상기 법무부장관은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강압적인 계엄 확대 조치에 반대하면서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한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2000년 10월 사망했다. 향년 82세. 국민훈장 모란장,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79년 12월 최규하 정부에서 제28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된 뒤, 긴급조치 위반자 중 윤보선 등 575명이 일반복권 대상자로 복권하고, 김대중, 함석헌, 지학순 등 112명을 특별복권자로서 복권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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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지난 21일 ‘윤석열 내란’에 동원된 방첩사 간부 20명의 검찰 진술 조서를 공개했다. 비상계엄의 집행부 역할을 했던 방첩사령부에서 벌어진 일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내란 초기 기록이다. 영문도 모르고 선거관리위원회를 접수하러 갔던 군인들의 모습, 영문도 모르고 정치인 체포작전에 동원된 군인들의 모습에서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불법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회한이 담긴 대목에선 인간적인 연민도 묻어났다. 이들이 대체 무슨 죄인가 하는 생각이 기록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상계엄 전) 여인형 방첩사령관의 ‘선관위 전산실 출입 통제’ 언급이 있었을 때, 불길함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후 국무회의에서 걸러질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만류하지 못하면서 역사적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12.3 비상계엄 당시 시차를 두고 ‘윤석열 대통령실’에 모인 국무위원은 모두 11명(윤석열 포함)이었다. 명단은 아래와 같다.
- 정성우 방첩사 1처장 4회 검찰 진술 조서 (2024.12.23.)
윤석열 대통령, 한덕수 국무총리,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 박성재 법무부 장관, 김영호 통일부 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김용현 국방부 장관, 조태열 외교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뉴스타파 한상진 greenfish@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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