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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포퓰리즘의 사회심리학 [신영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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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지난 1월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주변에서 윤 대통령 옹호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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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지난 토요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에 갔다가 우연히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게 되었다. 예전의 ‘태극기 부대’보다 규모와 목소리가 커졌고, 드문드문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전세계가 극우 포퓰리즘의 등장으로 어수선한 시대를 보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대통령 탄핵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오랫동안 이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정희진은 극우와 살아가는 법은 “단호한 대처”가 아니라 ‘공존’이라 주장한다. 물론 그 공존은 그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없애겠다는 이들, ‘나’의 죽음을 기도하겠다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각오가 함께하는 공존”이다. 찬반 댓글이 길게 달렸지만, 나는 그 공존이 이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공존만으론 부족하다. 윤석열 집단이 증폭시킨 극우 포퓰리즘의 공세는 오래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할 것이지만, 그 규모와 폐해를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그것의 발생 원인과 작동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사회심리학자인 세라 제이와 동료들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 불평등이라는 연료를 공급받아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불평등은 사회응집력과 신뢰를 약화하는데,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초래할 뿐 아니라 부유층도 자신이 저소득층으로 추락할까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극우가 빈곤층뿐만 아니라 부유층을 포함한 다양한 소득집단에서도 나타나는 이유다. 이는 불평등한 사회를 묘사한 에드워드 벨러미의 소설에 등장하는 마차의 풍경과 같다. 사람들은 마차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 치고, 마차에 올라탄 이들은 그 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을 생애 최고의 목표로 삼으면서도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혹시 마차에서 떨어질까 불안해한다.



이 불안감은 북한뿐만 아니라 이주자, 중국인, 동성애자와 같은 ‘외부자’에 대한 비난과 혐오로 발전하고,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고 말하는 목사’와 같은 카리스마 있는 집단에 합류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자신이 도덕적이라는 믿음이 필요해 ‘애국자’처럼 행동한다. 그들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이유다. 이 ‘도덕감’은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도 하고 불법 행위도 정당화한다. 또 국가 재정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여 가난한 이들조차 불평등을 줄이는 복지정책에 반대하고 긴축정책에 찬성한다. 이것은 다시 불평등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불안과 위협감을 오히려 증폭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으로 활용하는 극우 정치인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과거 향수를 다시 소환하고, 불평등의 확대와 정치, 경제정책의 실패를 오히려 상대 정치집단의 탓으로 돌리며 ‘적’들에 대해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불평등 감소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데, 그것이 그들의 정치 동력이기 때문이다.



극우의 영향력 확대는 역설적으로 기존 민주정치 세력이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시행했던 그동안의 누진세나 상속세와 같은 조세제도, 사회보장제도가 충분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평등은 부자와 가난한 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파괴적인 문제를 초래한다. 우리나라도 상위 1%가 전체 부의 22.3%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불평등 국가가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과거 노동으로 돈을 벌던 것에서 이제는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 되었고 신자유주의는 아주 교묘하게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소득과 자산을 가난한 이의 10배 이하로 제한하는 것과 같은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 하겠지만, 경제학자 잉그리드 로베인스 역시 부의 제한선을 둘 것을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정치적 제한선’으로 자산 기준 1천만달러(약 147억원), ‘윤리적 제한선’으로 자산 기준 100만달러(약 14억7천만원)를 상한으로 설정한다. 극단적 부는 부정한 돈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빈곤에 묶어두고,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환경위기의 주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극우의 득세는 불평등이 만들어낸 종말론적 위기의 신호탄인 셈이다. 우리가 극우와의 공존만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인류의 미래 생존은 우리가 얼마나 서로 평등하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흑인 퀴어 지식인 활동가, 시인, 도서관 사서, 교수, 전사,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오드리 로드의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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