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 기념서화첩’(1956)은 104명이 남긴 방명록이다. 운보 김기창이 그린 윤상의 초상. [사진 OCI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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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4년간에 걸쳐 모인 현대화가 작품 60여 점은 나의 큰 자랑이며 수집가라는 이름이 생기고 말았다…제2회전 때는 더 성대한 전람회를 열 작정이다.”(윤상, 수집가의 사명, 1956년 7월)
1956년 7월 수집가 윤상(1919~60)은 자기 소장품으로 꾸린 전시를 마치고 한 신문에 위와 같은 칼럼을 기고했다.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연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이다. 고희동·이상범·도상봉·천경자·김환기·장욱진 등 당대 화가 49명의 64점을 걸었다. 전시는 9일에 불과했지만 현대미술관의 필요성이 제기될 만큼 반향이 일었다. 윤상은 칼럼에서 “두 번째 전시는 더욱 성대하게 열겠다”고 다짐했지만, 41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됐다.
평양 출신으로 과수원을 운영했다는 정도만 알려진 수집가 윤상. 이제는 이름마저 생소한 그가 생전에 연 단 한 번의 전시는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 기념서화첩’(이하 방명록)으로 남았다. 한지를 묶은 빈 서첩 형태의 이 방명록에는 전시를 찾은 문화인들이 메모를 남겼고, 정성껏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에서 현재 행방이 확인된 건 유영국의 ‘도시’와 장욱진의 ‘가족’(아래) 뿐이다. [사진 OCI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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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품 화가 천경자는 도라지꽃을 그리고 “작품이 많이 나가지 않아 퍽 섭섭합니다”라고 적었다. 서양화가 박득순,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은 윤상의 얼굴을 그려줬다. 화가들은 메모에 ‘털보형’이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서화첩에는 출품 화가들 뿐 아니라 당대의 배우·문인·서예가·음악가·영화감독 등 104명이 다채로운 그림과 메모를 남겼다.
전시 도록도 없던 시절이었다. 전시의 면면은 리플릿(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속 출품작 목록과 윤상이 스크랩해 둔 관련 신문 기사들로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전시된 윤상 소장품은 그의 요절로 흩어졌고, 전시작 중 현재 행방이 확인된 작품은 2점이다. 한 점은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장욱진 회고전에 출품된 ‘가족’(1954), 윤상의 전시 당시에는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걸렸다. 미술관 유제욱 학예사는 “현대 미술작품이 창작되고 주인과 제목이 바뀌며 소비된 이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방명록이) 한국 현대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에서 현재 행방이 확인된 건 유영국의 ‘도시’(위)와 장욱진의 ‘가족’ 뿐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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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한 점은 유영국의 ‘도시’. ‘산’의 화가 유영국이 남긴 드물게 도회적인 반추상화다. 윤상의 전시 이후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이번 OCI 전시 출품작 중 유일한 윤상 수집품이다. 이번 전시에는 당시 49명의 참여 작가 중 유영국 외 15명의 그림을 걸었다. 방명록에 축하 기록을 남긴 사진가 임응식이 찍은 출품 작가 및 당시 전시 참석자들의 초상 사진 57점도 함께 전시됐다.
지난 1월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 전시 개막 이후 미술관에는 윤상에 대한 제보가 이어졌다. 한국근현대 미술사학회 신수경 회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이중섭의 1955년 미도파백화점 전시 방명록에 윤상의 도장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올 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연 원로 화가 박광진(90)은 “(윤상의) 전시 당시는 내가 홍대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스승 손응성과 윤상의 술자리에 동석한 기억이 있다”고 알려왔다. 미술관은 이런 자료들을 모아 콜로키엄을 열 계획이다.
이름도 잊힌 윤상이 한 권의 방명록으로 되살아났다. 윤상의 방명록에 당시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은 독일어로 한 문장을 남겼다.
“예술은 영원하다(Ewig Bleibt Die Kunst).”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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