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의 위로
불안할 때 포근한 품 찾는 본능은 어릴적 인형-이불 찾는 것과 비슷
세계 각국서 ‘마음안정인형’ 개발… 촉각 통해 어른도 스트레스 줄어
휴게 공간 포근하게 꾸미면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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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이나 틱톡 등에서 부드러운 천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lush’를 검색하면 봉제 인형 관련 게시물 수백만 개가 나온다. 각종 동물부터 눈 코 입 달린 사물 인형까지 다양하다. 귀여울 뿐 아니라 촉감도 보들보들해 보여 만져 보고 싶게 생겼다. 인기 많은 브랜드 한정판 제품은 중고 사이트에서 100만 원 넘는 가격에 팔린다.
영유아용 애착 인형으로 알려진 영국 인형 브랜드 ‘젤리캣’은 어른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형 게시물을 올리는 것도 대부분 성인이다. 신상품을 종류별로 수집하는 애호가도 많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서카나는 지난해 기준 전 세계 봉제 인형 시장 규모를 약 120억 달러(약 17조2300억 원)로 추정하며, 2030년까지 연평균 8%씩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 큰 성인이 인형에 열광하는 이유를 단지 키덜트(kid·어린이+adult·어른, 어린이 감성을 소비하는 어른) 문화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장난감 중에 봉제 인형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촉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부드럽고 포근한 촉감이 주는 심리적 위로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 마음이 힘들 땐 보드라운 것을 찾도록 진화했다
그렇다고 인형이나 이불에 집착하는 모든 아이가 애정 결핍은 아니다. 영국 소아과 의사이자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콧은 1951년 발표한 연구에서 아이들이 잠들 때나 분리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인형, 담요같이 부드러운 애착 대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추고 안정감을 찾으면서 독립을 연습한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이런 특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이 힘들 때 포근한 대상을 찾도록 진화해 왔다. 여러 신경생물학, 지각(知覺)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기분이 안 좋을 땐 뇌에서 촉각 자극을 추구하고, 기분이 좋으면 시각 자극을 선호하도록 환경에 적응했다.
이는 생존 본능과 관련 있다. 아기나 새끼 동물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이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보호자 품에 안기면 평소보다 더 큰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미국 심리학자 해리 할로가 1958년 발표한 ‘사랑의 본질’이라는 고전적 심리학 연구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어미와 헤어져 분리 불안을 겪는 새끼 원숭이가 철사로 만든 어미 모형과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 중 어느것을 더 선호하는지 살펴봤더니, 천으로 만든 모형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철사 모형에는 젖병이 달려 있어 먹이를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안한 새끼 원숭이는 먹이보다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더 좋아했다.
● 어른을 위한 ‘마음 안정 인형’
촉각이나 신체 접촉 관련 연구 상당수는 아동 발달에 관심을 뒀다. 사회가 점차 각박해지고 개인의 외로움, 우울증, 자살, 고령화 같은 현대 사회 문제가 불거지면서 연구자들은 어떻게 하면 성인도 촉각을 활용해 심리적 안정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는 불안과 우울감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주는 특수 인형 개발에 힘쓰고 있다. 영국 브리스틀대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공동 연구팀은 특수 제작된 숨 쉬는 쿠션을 개발해 성능을 검증했다. 실험을 위해 모집한 성인 129명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장하기 위해 수학 시험을 보겠다고 공지했다. 시험은 필기도구로 종이에 푸는 게 아니라, 남들 앞에서 화면에 뜬 문제를 보고 정해진 시간 내에 구두로 설명하는 압박 방식으로 이뤄졌다.
심리 검사 점수를 분석해 보니, 쿠션을 껴안고 있던 사람들은 전문가 지도에 따라 명상을 한 사람만큼이나 시험 전 불안이 감소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쿠션 덕에 ‘진정됐다’ ‘편안했다’ ‘위안을 얻었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연구진은 “긴장한 참가자들이 쿠션 움직임에 따라 호흡 속도가 느려지고, 부드러운 촉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부드럽고 폭신한 인형은 혼자 사는 노인의 우울감이나 외로움을 더는 효과도 있다. 일본 연구진은 스마트폰으로 통화할 때 상대방 음성에 맞춰 진동하는 인형 ‘허그비’를 개발했다. 60대 여성 18명 가운데 절반은 허그비를 껴안고 통화하도록 했고, 나머지 절반은 스피커폰으로 각각 15분씩 통화했다. 대화 상대는 연구진이 고용한 남자 대학생들이었다.
실험을 위해 오렌지색 ‘허그비’ 인형을 안고 있는 덴마크 노인들(위 사진)과 효과 비교를 위해 일반 스피커로 통화하는 노인들(아래 사진). 사진 출처 Frontiers in Psycholog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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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전후 노인들의 혈액과 타액을 채취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살펴본 결과 허그비를 안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그룹보다 코르티솔 수치가 훨씬 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허그비가 부드러운 촉각에만 반응하는 인간 신경섬유인 C 섬유를 자극해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뇌 편도체의 활성화 정도를 낮춘 것으로 분석했다.
● 안정이 필요한 곳엔 화려함 대신 포근함을
촉각의 위로가 반드시 인형 같은 천 소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댄 킹 싱가포르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크리스 야니셰프스키 미 플로리다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로션을 바를 때의 부드러운 느낌도 기분이 별로인 소비자 정서를 환기하는 힘이 있었다. 로션의 부드러움 덕에 기분이 좋아진 소비자들은 로션을 사는 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폭신한 인형을 종류별로 사 모으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특성에 주목해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휴식 공간을 꾸밀 수도 있다. 환경에서 느끼는 감각과 지각이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한 책 ‘조이풀’을 쓴 디자이너 잉그리드 페텔 리는 “어릴 적 애착 인형처럼 의미가 있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어른 역시 힘들 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폭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소품을 통해 얼마든지 휴식 공간을 꾸밀 수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만진 부드러운 소파, 쿠션, 무릎 담요 등이 건네는 위로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잠자리에 촉감 좋은 베개 또는 이불을 두거나 포근한 소재 잠옷을 입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대로 이런 소품들은 회의실이나 작업공간, 교실처럼 지적 탐구 능력이 필요한 곳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활력이 필요한 공간에는 안정감을 주는 부드러운 질감보다 화려한 패턴이나 색상을 활용해 시각을 자극하는 것이 좋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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