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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동반자[이준식의 한시 한 수]〈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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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 하얀 눈이 사라진 건, 세찬 바닷바람에 날려갔기 때문.
높은 하늘에서 분명 제 짝을 얻은 듯, 사흘 밤을 둥지로 돌아오질 않네.
푸른 하늘 구름 너머로 사라진 울음소리, 밝은 달 속으로 가라앉은 그림자.
내 관사에서 이후로는, 그 누가 이 백발노인의 벗이 되려나.
(失為庭前雪, 飛因海上風. 九霄應得侶, 三夜不歸籠.
聲斷碧雲外, 影沉明月中. 郡齋從此後, 誰伴白頭翁.)

―‘잃어버린 학(실학·失鶴)’ 백거이(白居易·772∼846)


시인의 객지살이 반려가 홀연 사라졌다. 세찬 바람에 백설이 날려가듯 정원 앞에 둥지를 틀었던 학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새하얀 날개와 우뚝 선 다리, 재잘대는 법 없이 다문다문 토해내는 카랑카랑한 울음소리, 그리고 수선스럽지 않은 몸짓. 학의 이런 모습에서 옛 선비들은 고고한 군자의 기품을 떠올렸고 흔쾌히 저들의 동반자를 자처했다. 한데 어느 겨울 갑작스레 변고가 닥친다. 울음소리도, 그림자도 하늘 저 멀리 사라지더니 사흘이 지나도록 학이 돌아오지 않는다. 푸른 하늘 어딘가에서 짝이라도 찾았다면 귀환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테다. 티끌 세상을 벗어나 구름과 달 저 너머 제 본향으로 회귀했으려니 자위할 수도 있으련만, 반려를 잃은 슬픔에 시인은 자못 가슴이 저리다.

학을 잃은 슬픔뿐이랴. 늘그막에 가족과 생이별한 데다 관직에 매여 자유로운 비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라, 정작 시인이 겪는 상심의 근원은 따로 있는지 모른다. 학의 귀환이 꼭 시인의 허적(虛寂)을 달래 줄 것 같지는 않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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