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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신자유주의…사회에서 합법적으로 벌어지는 ‘교묘한 착취’[최정균의 유전자 천태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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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부부,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부부,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왼쪽부터) 등 빅테크 최고경영자와 배우자가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 연구비로 개발된 혁신기술과 전 세계 저임금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의 대부분을 다양한 착취 기법으로 독차지해 천문학적인 부를 쌓아올렸다. 규제 완화를 비롯한 트럼프 2기의 더욱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들의 탐욕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워싱턴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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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죽음’과 ‘제도의 부재’ 속 오직 경쟁으로만 돌아가는 사회…특권 가진 이들 ‘유리한 위치 선점’ 더 쉬워져
민주주의에서 ‘자유 경쟁’이라는 탈을 쓴 ‘기울어진 운동장’…낙오자는 패배의식·자괴감에 빠지고 위장된 공정성 속 ‘혁명의 불씨’는 소멸돼
글로벌한 착취로 천문학적 자산 움켜쥔 일론 머스크와 빅테크 CEO들…트럼프 재집권과 함께 ‘악마적 불평등’ 가속화 불 보듯

인간은 존엄한가. 어째서 존엄한가 혹은 왜 존엄해야만 하는가. 철학적으로는 상당한 난제이겠지만 생물학의 관점으로 보면 논란의 여지조차 없는 문제다. 우리의 몸을 아무리 샅샅이 파헤쳐 본다 한들 그 어느 구석에서도 존엄의 흔적이나 이유 따위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신비에 싸여 추앙받고 있는 인간의 뇌도 사실상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해 온,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착오와 오류를 일으키는, 1.4㎏짜리 세포 덩어리에 불과하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를 인권이라 부른다. 그런데 인권이라는 것이 내재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도출하고 합의해 온 사회적 개념이라는 점은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엔이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 것은 1948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동안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있어 온 인권에 대한 기준을 국제적인 차원에서 처음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세계대전과 나치의 대규모 학살과 같은 참혹한 비극을 목도한 끝에 이루어진 일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허무함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계속해서 인권의 개념을 발전시켜 왔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의 인권 확립의 역사는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공격성의 진화에 관한 리처드 랭엄 하버드대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강력하고 지배적인 ‘알파 남성’에 대해 ‘베타 남성’들은 연합을 이루어 대항하기 시작했다. 랭엄은 이렇게 집단을 결성할 수 있던 힘이 언어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언어에 앞서 이들을 뭉치게 한 구심점이 된 것은 식량이나 짝짓기 상대를 강탈당하는 데 대한 억울함과 같은 감정, 즉 생존을 위협하고 번식 기회를 앗아가는 횡포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의사소통 및 협력의 능력과 더불어 불공정함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진화시켜 왔다. 이러한 감각은 당연히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류학적 관점이 현대사회에 대한 온전한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즉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호소는 사실 공정성을 향한 갈망의 발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권이란 너도 살고 나도 살기, 즉 공정한 생존의 보장을 위한 일종의 도덕적 합의 체계라는 것이다. 또한 공정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진화적 본능이라고 한다면, 인간 사회의 모든 법과 규율과 윤리는 바로 그것을 기저로 해 쌓아 올린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하기 위해 창조주까지도 호출되었던 것이다. 공정성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심지어는 유일한, 도덕률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 존엄하다는 신념도 공정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일 뿐이다. 존엄하므로 공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정하기 위해 존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정이 훼손될 때 인간 존엄의 허구성은 드러난다.

‘베타 남성’ 연합은 인간 정치 집단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즉 정치란 그 유래부터 공정성의 구현을 위한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치란 한정된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이해관계의 충돌과 갈등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행위라고 정의된다. 원시사회의 정치를 추동했던 것이 진화적 본능에 가까웠다면, 현대사회에서 무엇이 합리적인 배분인가 즉 공정성에 대한 보다 고도화된 정의는 문화의 영역에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정치를 구현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체계는 다름 아닌 국가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다론 아제모을루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교수의 저서다. 이들은 국가의 제도가 경제적 성패를 결정짓는 주요 요인임을 강조했다. ‘포용적 제도’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비교적 균등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 장기적인 성장을 이끄는 반면, ‘착취적 제도’는 권력과 부를 독점한 소수가 다수의 기회를 박탈해 장기적인 번영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과 북한이야말로 이 두 제도의 상반되는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생태학에서 착취는 일부 개체들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다른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간접적으로 빼앗는 경우를 말한다. 나무들은 햇빛을 더 받기 위해 경쟁한다. 어떤 나무들이 더 위쪽 공간을 선점하게 되면 주변 나무들은 그 그늘로 인해 성장에 제약을 받는다. 땅속의 물과 영양분에 대한 뿌리 성장 경쟁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코끼리와 얼룩말은 주어진 식물자원을 두고 착취 경쟁을 벌인다. 사자와 하이에나 역시 먹이를 두고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지만 한쪽이 먼저 먹이를 차지하면 다른 쪽은 곤란해진다. 강의 상류에 자리를 잡은 곰이 물고기를 과도하게 잡아가면 하류에 있는 다른 개체들에게 손실을 끼친다. 이와 같이 착취는 본질적으로 동등하거나 대등한 지위에 있는 개체들 간의 경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힘과 지위가 대등하지 않은 경우 개체들 간의 기회 다툼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높은 서열의 개체는 낮은 서열의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직접적으로 빼앗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는 경쟁이란 요소가 필요치 않다. 동물이 위계질서를 이루게 되는 이유는 자원을 얻고 번식을 할 기회를 차지하는 데 있어서 높은 지위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서열이 높은 개체는 좋은 먹이에 우선적으로 접근한다. 암탉들이 서열에 따라 먹이를 쪼기 시작하는 데서 유래한 영어 표현이 바로 ‘쪼는 순서(pecking order)’다. 개코원숭이 집단에서 새로운 알파 수컷이 등극하면 다른 수컷의 새끼를 모조리 죽인다는 사실이 발견된 이래로 260종의 포유류 중 45% 이상에서 이러한 유아 살해가 일어난다는 것이 밝혀졌다. 100마리 이상의 큰 집단을 이루고 사는 어떤 원숭이종의 경우 집단 내 새끼들이 모두 두세 마리 알파 수컷의 새끼들이라는 보고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아제모을루와 로빈슨이 지적한 ‘착취적 제도’하에 일어나는 일들은 위에서 말한 생태학적 착취와는 다르다. 그러한 예시로 언급되는 전제군주, 부패한 독재자, 공산당 등은 경쟁이 아니라 자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이론에서도 착취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핵심적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즉 국가는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 도구일 뿐이므로,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장악하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국가라는 시스템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마르크스 이념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계급이 철폐된 공정한 세상이었으나 공산당의 정치권력은 오히려 더 큰 불공정을 초래했다. 공산당원이라는 신분은 지위에 해당하며 이러한 자격은 권력을 부여한다. 이와 같이 권력을 통해 남의 재물이나 권리, 기회 따위를 빼앗는 행위는 위에서 정의한 착취, 즉 본질적으로 동등한 개체들 간의 위치 경쟁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가들의 실패는 ‘착취적 제도’라기보다 ‘박탈적 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경제체제의 스펙트럼에서 왼쪽 끝에 공산주의가 위치한다면 오른쪽 끝에 있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독재적 공산주의가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이 박탈을 통해서라면, 신자유주의가 공정성을 훼손하는 기작은 바로 착취다. 착취의 불공정은 계급(class), 신분(status), 지위(rank) 따위가 아니라 경제학적 지형에서 차지하는 위치(position)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 시대에 이야기되었던 자본가, 노동자, 지주라는 계급의 구분은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고소득 노동자는 웬만한 자본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다. 스타트업의 창업자들은 자본가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역할이 훨씬 크다. 투자회사라는 법인은 자본가로서 작동하지만 실제 업무를 하는 투자사 직원들은 노동자다. 어떤 의사가 병원 건물을 확보하고 다른 의사들을 고용해 함께 진료를 한다면 그는 자본가이자 노동자이며 지주(건물주)이기도 하다. 과거 지주들이 소작농들의 소득을 빼앗았다면, 오늘날의 건물주들은 세입자의 소득(임대료)보다도 주로 시세차익을 노리고 ‘투자’를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본가에 가깝다고 하겠다.

계급이 사라지고 오직 경쟁으로만 돌아가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표면상으로는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 규제가 없는 자유 경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정할 수가 없다. 바로 경쟁에 임한 이들의 위치가 시작점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더 빨리 자랄 수 있는 나무와 같이 유전적으로 능력이 뛰어나거나, 상류에 자리 잡은 곰과 같이 그저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거기서 지대라는 형태로 가치를 뽑아간다. 현대사회에서 지대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취하지만, 그 공통점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고 특권적인 불로소득을 얻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손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각종 금융기법과 주식 놀음, 조세 회피와 탈세 등을 이용해 회사의 경영진이 가로채는 이득, 상속받은 재산으로 부동산을 사들여 공공의 지역 개발로부터 얻는 이익과 같은 것들이 그 예다. 특히 이들은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가치를 빨아먹는다는 점에서 사회 경제의 기생충과 같다. 유명 운동선수, 연예인, 작가, 전문가들의 승자 독식으로 동일 분야에 있는 다른 이들의 정당한 소득이 깎이고 기회마저 상실될 때 이러한 것도 넓은 의미의 지대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직접 노동으로 만들어낸 순가치 이외에 이름값이나 입지로 인해 발생한 잉여가치는 불로소득에 가깝다.

프린스턴대학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 교수는 신자유주의를 정치의 죽음으로 묘사했다. 즉 신자유주의 국가는 공정의 구현이라는 정치적 임무를 포기하고 모든 국민을 자유 경쟁으로 내몬다. 마르크스, 아제모을루와 로빈슨 등이 말했던 착취와는 다른, ‘자연적인’ 혹은 ‘생물학적인’ 착취가 사회 전체에 만연한다. 그것은 유전자가 부추기는 경쟁심과 함께 은밀하고 교묘하게 작동한다. 착취라고 하면 채찍질당하는 노예나 억압받는 노동자의 모습만 떠올리는 이들에게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착취라는 말은 생경하기만 하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착취는 합법적으로 벌어진다. 이 ‘정당한’ 경쟁의 승자가 교만을 누리는 동안 낙오자들은 패배의식과 자괴감에 빠지고 혁명의 불씨는 위장된 공정성 속에 소멸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주로 왜곡된 정치권력을 가진 국가들이 ‘박탈적 제도’로 인해 실패한 사례들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치의 죽음과 제도의 부재 속에서 착취가 공정성을 훼손하고 인간 존엄의 허구성이 까발려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국가들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경쟁에 지친 한국인들은 국가의 존폐마저 불확실해질 정도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있다. 글로벌한 착취로 수백조원이라는 상상하기도 힘든 자산을 움켜쥔 일론 머스크와 빅테크의 최고경영자(CEO)들은 트럼프의 재집권과 함께 악마적인 불평등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정균 교수

경향신문

카이스트 교수로 2009년부터 재직하며 인간유전체학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목표는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유전학적 원인 규명과 진단 및 치료기술 개발이며, 진화론을 접목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아산의학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선정 과학기술인상을 포함해 여러 학회의 학술상을 수상하였고, 과학기술한림원 선도과학자,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에 선정된 바 있다.


최정균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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