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도가 출토되면서 155호분이라는 숫자로 불리던 무덤이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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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973년 발굴 당시에만 해도 경주 황남동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은 ‘155호분’이라는 고분 번호로 불렸다. 1971년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정부는 경주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인 ‘98호분’, 그러니까 오늘날의 황남대총을 발굴하려 했다. “저 산 같은 무덤을 미쳤다고 발굴해!” 그러나 문화재관리국 고(故) 김정기 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대규모 신라 고분 발굴 경험이 없었던 터였다. 조사단은 그 주변에 있는 조금 작은 고분부터 시험 삼아 발굴해 보기로 했다. 그 고분이 155호분이었다.
그런데 예비 조사격으로 살펴본 155호분에서 국보 제188호로 지정된 천마총 금관을 비롯해 1만1526점에 달하는 유물이 쏟아지는 ‘잭팟’이 터졌다. 그리고 1974년, 자작나무 껍질을 덧대 만든 ‘장니’(말 탄 사람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에 그려진 ‘천마도’ 발견을 계기로 단순히 숫자로 매겨졌던 155호분은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그 시절 발굴단의 이름은 천마총 조사단도 아니고, 155호분 조사단도 아니고, 미추왕릉지구 발굴조사단이었다.
조사원들이 출토된 금관을 들어 올리는 모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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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21일, 98호분 북쪽 기슭에서 연 천마총 발굴 위령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봉토조사에 착수한 과정부터 금관, 천마도 등 주요 유물이 발견된 순간이 현장감 있는 생생한 증언으로 담겼다. 당시 조사원들의 봉급(3만6000원), 가열된 언론사의 취재 경쟁, 당시 국가 원수였던 박정희 대통령과 얽힌 비사 등 역사적 발굴을 둘러싼 뒷이야기와 당시 현장을 촬영한 사진도 살펴볼 수 있다.
1973년 3월 21일, 위령제를 올리는 모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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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은 위령제를 끝낸 뒤, 천마총 봉분 꼭대기부터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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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전경.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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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원들은 한 목소리로 천마총 조사가 한국 문화유산 발굴과 보존의 전환점이 된 시기라고 전했다.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그때는 보존과학이라는 의미도 전혀 몰랐고, 우리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발굴해 왔지만, 앞으로 이런 큰 발굴할 때는 보존과학이 큰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었다”며 “천마총 발굴을 끝내고 프랑스로 건너갔고, 거기서 보존과학에 대해 아주 잔뜩 신경을 쓰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용산에 새 박물관을 만들 때(국립중앙박물관), 기존보다 5~6배 보존과학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게 다 ‘천마총 효과’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도 “지금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우리한테 연수받으로 온다”며 “우리나라 보존과학이 정말 이때 시작해서 50년 만에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자료집은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운영하는 ‘국가유산 지식이음’ 누리집(https://portal.nrich.g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공립 도서관과 연구기관, 교육기관 등에도 배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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