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내가 짤게. 글씨는 누가 쓸래?”
2000년 12월 종영한 드라마 ‘순풍산부인과’에서 방학숙제를 미루는 미달이 때문에 엄마가 가족들에게 한 대사가 떠오르는 요즘이다. 일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업무는 피해가려는 의도가 담긴 말에서 구글이 엿보인다.
구글은 지난달 16일 유튜브에 ‘크리에이터를 위한 권장사항’으로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영상을 기업의 인공지능(AI) 모델 훈련에 활용하도록 허용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유튜브가 ‘플랫폼’으로서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을 AI 기업에 넘기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뒤 따르는 말은 이와 같았다. “서드파티(third party, 제 3자) 회사는 구글·유튜브와 별개이므로 궁극적으로 서드 파티 회사의 행위를 본 기업이 제어할 수 없습니다.” “책임은 누가 질래?”라는 말이 유난히도 길어보였다.
의문이 마구 떠오른다. 크리에이터가 AI의 학습에 제 영상을 넘기고 받는 이득은 대체 무엇일까. 콘텐츠 활용으로 피해가 발생하면 누가 어떻게 보상할까. 플랫폼인 유튜브가 가져가는 수익은 어떻게 될까.
그러나 크리에이터가 본인의 계정 설정에서 영상 학습을 허용하더라도 이에 대한 혜택이나 기업의 콘텐츠 활용 범위, 피해 보상 등에 관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유튜브가 유일하게 안내하는 점은 ‘서드 파티 회사가 개발 중인 AI 모델을 학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AI 모델을 학습시키기 위한 목적’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AI 모델을 만들 때만 영상을 쓸 수 있다는 것인지, 파인튜닝 할 때도 쓸 수 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즉 이런 모호한 상황을 활용해 사업자들은 조건이 명확해질 때까지 크리에이터가 이용을 허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영상을 활용할 수 있는 셈이다.
본지는 유튜브 측에 영상 활용 기준과 보상 등에 대해 문의했으나 유튜브 측은 답변을 회피했다. 유튜브가 크리에이터에게 AI 기업이 학습할 수 있도록 영상 공유를 권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마련은 누군가에게 미룬 모습이다.
그 누군가는 결국 개인인 크리에이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의 활용 범위와 이에 대한 보상을 두고 논쟁이 예견된다. 학습한 AI의 아웃풋이 크리에이터의 영상과 유사할 때는 저작권 논란이 일 수 있다. 더군다나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을 학습하는 건 데이터가 폐기되지 않아 피해를 예측하기 힘든 파운데이션 모델인데 말이다.
유튜브는 과거부터 투자 리딩방 사기, 정치 음모론 등 가짜뉴스의 온상임에도 ‘플랫폼일 뿐이라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해 지탄받아왔다. 플랫폼으로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각종 기능을 출시할 뿐 이로 인해 일어날 부작용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논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다음엔 또 어떤 책임을 떠넘길까.
[이투데이/임유진 기자 (newjea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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