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서 10년간 일했다.”
고백 또는 폭로를 예감하게 하는 첫 문장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사이드웨이 펴냄)은 문체부 전직 서기관 노한동의 일 경험을 담은 에세이이자 한국 공직사회 비평서다. 저자는 10년 동안 참여관찰을 하면서 그 사회에 동화됐던 인류학자처럼 자신이 겪은 일화를 바탕으로 중앙부처 공무원 사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겉과 속이 다른 역설로 가득 찬 곳이 어디 공직사회뿐이겠냐만,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기에 읽으며 장탄식을 금할 수 없다. 현장과 멀찍이 떨어져서 술자리에선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고 외치고,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면 “5분 만에 읽을 수 있는 한 장의 보고서”로 요약하는 사람들. 대통령은 5년, 장차관은 1~2년이 고작이지만 일반직 공무원은 30년 동안 자리에 있으면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가 돼간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각종 지원에서 배제된 사건을 예로 들면서 저자는 만약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더라도 항명을 못하고 지시를 수행했을지 모른다며, 그래서 두려웠다고 말한다. “위법한 지시는 앞으로도 늘 있을 텐데”라는 가정 때문이다.
공직사회에서 명령의 위법성과 부당성을 완벽하게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윗선의 지시를 이행한 공무원의 행위는 형사 처벌 등 법적 책임이 확장되고 있다. 이에 관료들은 “조용하지만 영민하게 대응”한다. 실무자는 과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한 보고서를 ‘과수원’, 국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하면 ‘국수원’으로 파일명을 추가해 책임 소재를 남기고 회의를 녹음한다. 업무수첩에도 지시사항을 빼곡히 적는다. ‘면피’를 위해서다. 그것이 본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여긴다.
똑똑한 사람들이 왜 공무원이 되고 나서 무능해지는가? ‘이래도 되나’ 자문하면서 공무원들은 왜 지시와 명령을 이행하는가? 110만 명이라는 거대한 공직사회가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저자는 이 장막의 엘리트 공동체를 설명할 의무감과 책임을 느껴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읽다보면 단지 공직사회의 이야기라기보다 우리 사회 전체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란 사태와 제주항공 참사를 함께 겪으며 ‘한국 행정’의 본모습을 알고 싶다면 적절한 책일 것이다. 284쪽, 1만8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당신도 증명 가능한가요?
정영민 지음, 남해의봄날 펴냄, 1만7천원
저자는 태어날 때 황달을 심하게 앓아 뇌병변 장애인이 됐다. 문서로 하는 ‘증명’ 없이는 사각지대에 놓이고 마는 장애인 제도의 문제와 함께 평범한 이웃으로서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184쪽의 작은 책인데 자신의 경험과 장애인 일자리, 복지, 돌봄의 문제까지 세심하게 다뤄낸 솜씨가 돋보인다. 숙고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독서
신동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만2천원
시인,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신동호가 대통령의 연설문, 담화문, 기고문에 담긴 인용·참고된 책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어떤 책이 대통령 생각의 씨앗이 되어 말과 글로 탄생했는지 경로를 살핀다. 서너 권의 책을 읽고 연설문 딱 한 줄을 쓰는 연설비서관의 일상, 탐독가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는 어려움 등도 담겼다.
여성 상징 사전 1~2
바버라 G. 워커 지음, 여성상징번역모임 옮김, 돌고래 펴냄, 4만원
1988년 영어로 출간된 뒤 수십 년간 권위와 인기를 함께 얻은 상징 사전. 저자는 한국에서 ‘흑설공주 이야기’로 잘 알려진 신화와 상징 전문가. 최근 상징 관련 책들의 인기와 함께 출간 전부터 기대감을 모았다. 1권은 도형, 2권은 신성한 물건과 기호, 의례를 다뤘다. 3권은 동물, 4권은 식물을 다룰 예정.
세 번째 전장, 자궁절제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엮음, 박지순 옮김, 갈무리 펴냄, 2만원
‘페미니즘의 투쟁’ ‘집안의 노동자’로 잘 알려진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가 출산, 임신중지에 이은 ‘세 번째 전장’으로서 자궁절제술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설명한다. 여성 몸과 남성 중심적 의료지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주목하라. 의사-환자의 관계, 역사, 여성의 목소리를 고루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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