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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수)

“그 많은 샤인머스캣이 설에 쏟아져 나오면 어쩌지?” [남태령을 넘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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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포도 농부 김희수씨가 지난달 17일 경북 김천 감문면 자신의 포도밭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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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두려운 농부

충북 옥천·영동에서 경북 상주·김천까지를 ‘포도벨트’라고 부른다. 일조량이 많고 낮밤 일교차가 커 포도 재배에 유리하다. 원래 쌀농사를 하던 곳이었지만, 1980년대 ‘포도가 돈이 된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포도 붐이 일었다. 포도라고 하면 검푸른 색의 캠벨(캠벨얼리) 정도만 알던 시절이었다. 김천 살던 김희수씨(58) 부친도 이때부터 캠벨을 키웠다.

껍질이 두껍고 씨가 많은 캠벨은 2004년 칠레에서 껍질째 먹는 씨 없는 포도가 들어오면서 인기를 잃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칠레산 포도가 대세가 됐다. 구미공단 유리공장 직원이었던 김씨가 아버지의 캠벨농장을 이어받은 건 2008년. 이미 많은 캠벨농가들이 문을 닫았을 때였다.

귀농한 김씨는 ‘자옥’이라는 새로운 포도를 심었다. 일본에서 개발한 품종으로 거봉처럼 알이 크고 껍질째 먹을 수 있는 포도다. 가격도 캠벨보다 더 받았다. 자옥을 키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6년 사이에 페루(2011년), 미국(2012년), 호주(2014년)와의 FTA로 수입 포도가 물밀듯 들어왔다. 끔찍한 시절을 버틸 수 있도록 해준 게 자옥이었다.

반면 폐업한 캠벨농가들은 복숭아와 자두 따위로 몰렸다. 고령농이 많아서 새로운 품종에 도전하기 쉽지 않았고, 물컹한 복숭아와 자두는 보관·운송 비용이 많이 들어 외국산이 들어오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값도 좋았다. 특히 옥천과 영동은 복숭아로 갈아탄 농민이 워낙 많아 이제는 복숭아 주산지가 됐다. 복숭아는 생산량 과잉으로 가격 하락을 고민하는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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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농사를 짓는 김희수씨가 경북 김천 감문면 자신의 포도밭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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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다발적인 FTA에 고군분투하던 포도농가를 살린 건 2013년 전후로 한국에 퍼지기 시작한 일본의 샤인머스캣이었다. 알이 크고 달콤한 데다 껍질째 먹을 수 있는 고급 포도다. 한국으로 치면 농촌진흥청 격인 ‘일본 농업식품산업기술종합연구기구’가 1988년 개발한 포도인데, 신품종 등록을 하지 않아 한국 농부들이 로열티 한 푼 주지 않고 재배할 수 있었다.

김씨도 캠벨과 자옥이 나던 3600평(1.19㏊) 포도밭을 샤인머스캣으로 바꿔가기 시작했다. 2015년부터 새 포도를 수확했다. 샤인머스캣 3~4송이 담긴 2㎏ 상자를 가락시장에 내면 5만~6만원을 받았다. 대목에는 10만~11만원까지 값을 쳐줬다. “인근 구미공단 대기업 직장인 연봉보다 훨씬 좋았죠. 1200평만 해도 매출 1억 넘기가 우스웠거든. 자재비·인건비 같은 걸 다 제해도 80%는 남았으니까…”

너도나도 샤인머스캣을 심었다. 전국 지자체 농업기술센터들도 농가에 샤인머스캣을 권했다. ‘참외 주산지’ 경북 성주에서도 비닐하우스에 참외 대신 샤인머스캣을 넣기 시작했다.

퇴직해 귀농한 이들도 뛰어들었다. “거기다가 현직 시의원, 도의원, 지자체 국장·과장, 농협 전무·상무까지 다들 샤인머스캣 하겠다고 난리였죠.” 공급이 늘면서 2~3년 전부터 샤인머스캣 가격이 쭉쭉 빠졌다. 2㎏이 1만원대로 떨어졌다. 뒤늦게 뛰어들었다가 투자비도 건지지 못하고 포도농장 문을 닫는 이들도 생겼다. 지난해 김천에서 40대 포도농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품질이 떨어지는 샤인머스캣이 시장에 풀린 것도 가격 하락을 부추겼다. 샤인머스캣은 9월 말에서 10월 초·중순에 수확했을 때가 가장 당도가 높고 상품성이 있다. 일부 농가들이 대목인 추석에 맞춰 출하하려다 보니 이른 추석이 있는 해에는 덜 익어 밍밍한 샤인머스캣이 시장에 넘쳐났다. 지난해 추석(9월17일)과 2022년 추석(9월10일)이 그랬다.

김씨는 지난해 10월에 수확한 샤인머스캣을 저온창고에 보관했다가 크리스마스에 일부를 풀었다. 저온창고의 샤인머스캣은 장기 보관을 위해 유황패드를 덮어두는데 유황패드값도 못 건질 만큼 샤인머스캣 가격이 좋지 않았다.

다음 대목은 오는 설이다. “김천에서만 유황패드가 이번에 3배 이상 팔렸어요. 다들 지금 저장을 많이 넣었단 말이지. 저장비 상쇄시킬 가격은 돼야 할 텐데… 이제 그 샤인머스캣이 언제 다 나오겠어요? 설에 쏟아진다는 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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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기자 just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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