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2일 전남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현장 울타리에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시지와 국화가 놓여 있다. 무안=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대통령이 불법 계엄을 선포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통제하겠다 나서고, 누군가에게는 세계의 전부인 사람의 죽음이 참사라는 이름으로 쓰이는 고통스럽고 참혹한 연말. 새삼 문학의 자리를 생각합니다. 자주 회자되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건 야만”이라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처럼 이 시기에 문학을 이야기하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일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의문을 품고 ‘회복하는 문학’이라는 주제의 격월간 문예지 릿터 51호를 집어 들었습니다. 이소 문학평론가는 여기에 실린 ‘문학이 있는 자리’라는 글에서 이런 믿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어서 문학이야말로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고통을 응시할 수 있다고, 치열하고 끈질기면서도 안심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곁의 자리’를 빚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소 문학평론가
그가 말하는 '곁의 자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작품에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지난달 노벨문학상 강연에서 이인칭 시점이 등장하는 자신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두고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이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 이인칭 호칭에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 느껴졌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죠.
민음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문예지 릿터 51호 표지. 민음사 제공 |
이인칭 호칭을 쓰지 않더라도 문학은 개인의 일인칭과 타인의 삼인칭 사이 ‘이인칭 고통’의 자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고통을 포함한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문학을 읽은 독자가 그 타인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이는 “아무리 독백의 형식을 하고 있어도 영영 독백으로 남을 순 없는”(이소 문학평론가) 문학이 고통스러운 어제와 오늘, 내일에도 존재했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