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24년 12월14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일대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 집회에 나온 시민들이 음악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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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효 | 영화감독
‘중심은 지탱할 수 없다.”(The centre can not hold.) 예이츠의 시 ‘재림’(The Second Coming)에 나오는 이 구절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주 얘기했다. 케이(K)팝, 케이드라마, 케이영화와 케이푸드까지 세계를 휩쓸고 있다. 휴일 광화문이나 홍대 앞에 가면 눈에 보이는 사람 중 절반은 외국인이다. 우리가 한때 파리나 뉴욕을 선망했듯이 수많은 이국의 청년들에게는 케이컬처의 수도인 서울은 선망의 도시가 되었다. ‘오징어 게임 2’가 다시 전세계 안방을 점령하고, 로제의 노래는 여전히 여러 나라의 음악 차트를 휩쓸고, 멤버 모두가 전역하고 다시 뭉칠 비티에스(BTS)를 전세계의 아미들이 기다린다. 그러나 그 모든 문화를 지탱하고 끌고 나가야 할 중심으로서의 정치권력은 무력하고 무능했다. 이 중심이 청년문화에 개입했을 때 얼마나 재앙적인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새만금 잼버리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타락한 중심의 구심력은 빛나는 주변들을 아우를 수 없었다.
그러나 12·3 내란사태 이후로 중심과 주변은 자리를 바꾸었다. 케이컬처를 주도하는 세대가 광장으로 나왔다. 촛불은 아이돌의 응원봉으로 대체됐고, 소녀시대와 로제의 노래가 어떤 운동권 노래보다도 강력하게 광장의 사람들을 응집했다. 국회에서 1차 탄핵이 부결됐을 때, 우는 청년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청년들은 밤늦게까지 노래를 불렀다. 눈물과 흥겨움은 더 이상 대립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들은 그 한 주 뒤 기어코 국회의 탄핵 가결을 이루어냈다. 가결 순간에 월드컵 때보다 더 열광하던 청년들이 맨 처음 부른 노래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그날 한국 정치의 중심은 광장의 청년들이었다.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심은 바뀌었고, 새로운 중심은 어떤 것이든 지탱할 수 있는 에너지로 넘쳐났다.
그 며칠 후에는 이들은 남태령으로 달려가서 트랙터 농민들과 함께 경찰의 차벽을 뚫었다. 또 그 며칠 후에는 장애인 연대의 시위 현장으로 달려가서 연대했고,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산업재해 전문병원을 짓기 위한 모금에 가세하면서 순식간에 누리집을 다운시켰다. 거미줄 같은 수도권 지하철을 통달한 이들의 이동은 특전사의 헬기보다 빠르고, 응원봉과 물, 간식, 방석과 핫팩으로 꾸려진 이들의 배낭은 영하 10도의 철야를 감당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광속의 손가락들은 각종 소셜미디어에 실시간 정보들을 방첩대보다 빠르게 실어 날랐고, 즉흥 연설은 어떤 정치인보다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거짓 없이, 느낀 대로 얘기하는 걸 이들은 케이컬처로부터 학습했다. 아이돌 팬덤의 자유롭고 공평한 연대로 출발한 이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위협받는 순간, 가장 정치적인 영역으로 진출했고, 나아가 약자와의 연대라는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이념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군부독재와 싸웠던 1980년대 청년들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민주주의라는 환상을 위해서 싸웠다. 그러나 그 환상이 현실이 된 이후에 태어난 청년들은 자신들의 디엔에이(DNA) 이중나선 속에 민주주의라는 단백질 정보를 새기고 태어났다. 청년들은 케이컬처를 만들고 향유하면서 그 유전자 정보를 자신들의 삶에서 실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위협받았을 때, 이들이 보여주는 저항과 연대는 과거의 청춘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유연하고 포괄적이었다. 놀이와 저항, 본능과 학습, 그리고 정치와 문화의 경계는 사라지고, 광장에서 온통 긍정적인 에너지로 뭉쳐져 폭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핸드폰으로 가사를 보면서도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를 수 없는, 나와 같은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세상을 꿈꾸지 말 것이다. 4박자 정박에 ‘산 자여 따르라’나 ‘나 이제 가노라’ 같은 선언적 종결문으로 끝나는 노래로 꿈꾸던 세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세상은 ‘다시 만난 우리의’이라는 미완의 문장으로 끝나는, 한계 없는 가능성으로 넘실거리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 대한 기성세대의 가장 큰 선의는 그들의 도구임을 자임하는 것 말고는 찾을 수 없다. 그 도구들이 봉사할 세상은 ‘특별한 기적을 바라진 않지만’ ‘희미한 빛’을 쫓아갈 만큼 끈질기고,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세상이고, ‘반복되는 슬픔은 이젠 안녕’ 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의 청년들이 만들어 가는 케이-데모크라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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