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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12·3 내란사태는 아직도 지속 중이다. 이 내란은 조속히 진압되어야 하지만 그를 위해서라도 이 내란의 성격이 무엇이며, 이것을 진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사건은 법적으로는 내란이라는 점에서는 전두환 일당의 12·12 군사반란과 유사하지만, 정치적으로는 2017년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에 더 가깝다. 전자는 전두환 일당의 7년여 공고한 통치와 처절한 시민적 저항의 기점이 되었으나, 후자는 오히려 탄핵이라는 합법적 반격으로 기왕의 권력을 상실하는 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이번 내란의 진압과 그 이후를 생각하는 일은 2017년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진행을 올바로 회고하는 일과 분리될 수가 없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시대인 오늘날 자본과 노동, 상품의 유통 등 경제 영역은 절대 불가침의 시장의 영역이 되었고 사회문화적 영역이나 이데올로기 영역들도 이러한 시장 절대주의를 전제로 관리되고 통제된다. 그리고 정치라는 것은 이런 구조화된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유지 관리를 위한 한갓 서비스 영역으로 전락했다. 집권 세력의 이념적 성향이라는 것도 이런 상태에서는 사실상 무의미한 장식물에 불과하게 된다. 금융자본을 위시한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의 입장에서는 우파 정권이면 노골적이고 용이하게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고, 중도나 좌파 성향의 정권이라면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더 양보하는 척해야 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시기가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리는 시기였으며,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결국 도둑 정권이거나 부실 정권으로 판명 나고, 문재인 정권이 허울뿐인 민주 정권으로 사실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채로 끝나버린 것을 돌이켜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신자유주의 통치 시대의 후진국형 우파 도둑 정권의 가장 타락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에 좋은 시절을 구가했던 한국의 우파 기득권 세력은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권 수립으로 잠시 그 기득권 행사를 방해받거나 원치 않게 재분배해야 했던 불쾌한 기억을 떨치기 위해, 단지 문재인 정권과 대립함으로써 일시적 지명도를 얻은 데 불과한 윤석열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특수통 검사를 자신들의 대표선수로 내세웠다가 마치 로또를 맞듯 덜컥 정권 탈환에 성공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윤석열이라는 인물이 정치 경험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가지기에는 너무나 자격 미달이었다는 것이다.
이명박은 사기꾼이었지만 그래도 재계와 정계에서의 오랜 경험으로 최소한의 겉치레는 할 줄 알았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것 이외엔 해놓은 일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독재자의 딸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다운 나름의 품격은 있었다. 하지만 윤석열은 날이 갈수록 한마디로 목불인견의 인물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난데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파행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동안 사실상의 대통령 노릇을 했다는 처 김건희의 사주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사태는 아무튼 자신에게 굴러들어온 대통령 자리를 더 오래 사유화하고 싶었던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욕망의 돌출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일은 벌어졌고, 한참 선진국 소리를 듣던 대한민국은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친위 쿠데타가 가능한 후진국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윤석열이 이렇게 서둘러 자폭을 하는 통에 오히려 그동안 누적되었던 한국 사회의 정체 상태가 빨리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현재의 내란 상태는 합헌적 방식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종결되어야 한다.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 인용을 통한 파면과 내란죄 수사와 재판을 통한 법정 최고형 집행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여기에 다수의 내란 동조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국민의힘’이라는 이름의 극우 기득권 정당의 해체도 적극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통한 새로운 민주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총선 승리 이후로부터 내란 진압 국면에 이르기까지의 일사불란한 투쟁을 통해 문재인 정권 실패의 책임을 일부 탕감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 한국의 정치 지형으로는 집권당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으로 내란 진압의 정치적 프로세스는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한국 민주주의가 다시 회복되었다고 하면 순진한 생각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지점은 한국 민주주의의 그라운드 제로에 불과하다. 1987년 이후 시작된 민주 공화정의 가능성은 지난 30년 동안의 양당 지배 체제 아래서 갈수록 질식되어왔다. 사실은 폐허나 다를 바 없는 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자유, 평등, 연대라는 고전적 정신에 기초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역정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정은 낡은 주체가 아닌 새로운 주체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그때까지는 자기 정체성이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했던 청년/여성들이 이번 여의도 광장에서는 마침내 압도적인 집단주체로 부상했다. 공기처럼 호흡하던 민주주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불러낸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들은 놀라운 적극성으로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한 싸움 속에서 기꺼이 기성세대와 손을 잡았고 더 나아가 남태령의 농민들에게, 안국동의 장애인들에게, 모든 투쟁 중인 소수자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정체성 정치에 매몰된 줄 알았으나 떨쳐 일어서 내란 진압의 선봉에 서고 더 나아가 경이로운 연대의 행보를 보이는 이들에게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가능성을 보는 것은 감동이었다.
이들은 얼간이 대통령 하나 몰아내자고 엄동의 길바닥에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광장의 스펙터클’에 머릿수 채워주려고 일할 시간, 공부할 시간 다 제치고 뛰어나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더 이상 ‘기특한 젊은 애들’이 아니다. 이들이 정치적 주체로 우뚝 서야만 불평등과 차별과 배제와 혐오로 멍들어가고, 파국적 기후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인 한국 사회는 비로소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 내란이 완전히 끝나는 시점은 바로 이들이 꿈꾸는 ‘다시 만난 세계’, 새로운 민주공화국이 시작되는 시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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