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9월 2일 41세의 도널드 트럼프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보스턴글로브 신문에 전면 광고를 게재합니다. 미국 국민을 향한 호소문입니다. 엄청난 무역흑자국인 '돈 버는 기계' 일본을 위해 왜 미국이 막대한 방위비를 써야 하느냐고 질타합니다.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입니다. 청년 트럼프는 부자 나라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방위비를 받아내 미국 노동자와 빈곤층을 돕자고 주장합니다. 관세로 무역적자를 줄이고 미국 제조업을 살려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해 트럼프는 자서전을 내고 공화당에 입당합니다. 1999년엔 당적을 바꿔 '아메리카 퍼스트'를 주창한 개혁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섭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뿌리가 깊습니다.
트럼프와 카멀라 해리스의 대결이 치열했을 때 누군가 물으면 필자는 트럼프의 당선을 얘기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과 대결했던 2016년 경험을 들려줍니다. 모두가 힐러리의 승리를 예측했던 대선 직전, 매경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공화당 보수파 거물 정치인은 트럼프 당선을 예견합니다. 손녀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미국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토론을 벌였는데, 손녀를 뺀 다른 학생들 모두 트럼프와 같이 미국 우선주의에 찬동했답니다. 힐러리는 세계 리더를 지향하는 국제주의자인데, 부유층 아이들까지 돌아섰다고 진단합니다. 미국 쇠락 지역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와 절망감은 변함없습니다. 만나본 미국 변호사들도 트럼프는 불합리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수의 미국인이 보호무역과 해외 개입 반대 입장을 지지합니다.
트럼프 당선인은 '관세맨'이라 자칭합니다. 모든 수입품에 10%, 중국 제품엔 60%까지 관세를 물리겠다고 합니다. 관세 강경론자들을 핵심 관료로 발탁합니다. 로스쿨 출신도 많습니다. 불공정 무역을 제재하는 무역법 슈퍼 301조, 국가 안보 이슈로 발동되는 무역확장법 232조, 중국 위구르 강제노동방지법을 거론합니다. 주한미군 이슈도 예상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담판으로 북한 핵무기가 용인된다면 한반도 안보 환경은 요동치게 됩니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는 수출 국가 대한민국에 독(毒)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이 관세장벽을 높이면 중국과 유럽도 빗장을 잠글 수 있습니다. 미국에선 차별관세로 중국보다 우리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지만 제3국에선 싸고 질 좋은 중국 물건에 밀릴 수 있습니다. 안보 상황이 악화되면 해외 자본이 한국을 기피하고 제품 구입도 줄어듭니다.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의 책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에선 탈세계화 시대에 설 자리가 없어질 나라로 한국을 지목합니다. 잘못하면 산업혁명 이전으로 후퇴한다고 경고합니다.
트럼프 2기 자국 중심주의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은 각자도생하는 광야에 섭니다. 나라와 기업의 명운을 걸고 생존력을 높여야 할 때입니다. 트럼프도 즐겨 읽는 손자병법의 핵심인 지피지기(知彼知己)가 기본입니다. 상대를 제대로 알고 나를 알아야 위태롭지 않습니다. 반도체와 조선업, 자동차와 원전, 방위산업 같은 우리 강점을 잃지 않게 뒷받침해야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미국인의 분노도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의 대응책을 세워야 합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미국 법과 국제협약도 살펴야 합니다. 외교협상도 법적 논리가 바탕이 돼야 힘을 얻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창의적 도전과 혁신으로 국경 없는 디지털 세상도 개척해야 합니다. 관군과 의병이 힘을 합쳐야 가능합니다.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과 노동자, 금융인, 법률가, 언론인이 함께 가야 폭풍우를 헤쳐 갈 수 있습니다. 새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둥지를 만듭니다. 한국인은 벼랑에 서면 늘 힘을 냈습니다.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봉욱 前 대검 차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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