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한국외대 교수?한국영화학회장) |
우리 모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말 한국 사회는 어느 때보다 극심한 혼란과 침통한 애도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윤석열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혼란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빠르게 해결방향을 잡는 듯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임명, 국무총리 탄핵, 대통령 사법처리 등 문제가 말끔히 정리되지 않아 여전히 어지럽다. 수십 년 전 겪은 계엄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많은 사람의 상처를 후비고 있다.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사고는 피해자와 유가족은 물론 온 국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사고 앞에서 참사의 트라우마는 아픔을 되새기게 한다. 이런 사건과 사고는 우리의 일상을 흔들면서 집단적 상실감과 불확실성을 가져왔다. 달력은 마지막 장을 남기고 버려졌지만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새해를 축하하는 상투적인 인사마저 조심스러울 정도다. 새해는 혼란과 애도를 넘어서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불안과 절망의 시대,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가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 할 이유가 남아 있을까. 우리에게 희망은 도대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새해 새 아침,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다듬어 본다.
첫째, 희망은 혼란을 극복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긍정심리학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마틴 셀리그먼은 희망을 '미래를 위한 낙관적 태도'라고 했다. 희망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중요한 심리적 자원이다. 계엄과 내란으로 무너진 공동체의 신뢰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갈 기회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와 연대는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희망은 혼란을 넘어 미래를 꿈꾸도록 돕는다.
둘째, 애도의 과정은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실과 애도를 탐구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애도를 부인-분노-협상-우울-수용의 단계로 나눈다. 최근엔 여기에 '의미찾기'라는 단계를 더한다. 그는 애도를 '상실을 통해 회복을 준비하는 단계'로 봤다. 끔찍한 항공사고로 많은 이가 가족과 친구를 잃었지만 이 슬픔은 생명의 소중함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 계기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애도의 시간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것이다.
희망은 인간의 본질적인 회복력을 상징한다.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올린 민주주의와 상호돌봄의 회복력은 단단하다.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를 지탱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것이다. 공동체의 연대는 위기 속에서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희망을 키워갈 것이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고향'이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희망이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희망은 땅 위에 난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말은 희망이라는 단어에 쓰인 한자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한다. '희'(希)와 '망'(望)은 둘 다 '바라다'는 뜻이다. 희망은 간절한 바람이다. '희'라는 한자에는 '드물다'는 뜻도 있다. 희망은 어렴풋한 바람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선명한 결과는 희망이라고 할 수 없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신념과 연대로 갖는 꿈, 그것이 희망이다.
희망은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용기이자 변화를 만들어가는 간절한 힘이다. 때때로 희망은 아직 나지 않은 길처럼 어렴풋한 모습으로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걷는 걸음을 통해 길을 만들 수 있다. 불안과 상실의 시기를 지나며 우리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새해에는 희망의 씨앗을 심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함께 걸어가야 한다. 혼란과 애도를 넘어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한국영화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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