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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토)

[신헌철칼럼] 해는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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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김승옥은 소설 '무진기행'에서 불가항력 앞에 사람들이 느끼는 무력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을사년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갯속에 있다.

지난 연말 무안공항의 비극 앞에 할 말을 한 번 더 잃었다. 그것이 못난 정치의 결과물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만든 세상이 여전히 안전하지 않음을 다시 깨닫게 했다. 그 고통과 슬픔 속에서 자원봉사와 추모 행렬은 이어졌다. 아직 온기가 있음에 희망을 품게 된다.

최고 권력자의 한밤중 비상계엄도 불가항력적 외력이었으나 시민과 국회의 힘으로 멈춰 세웠다. 그리고 예정된 경로와 과거 경험에 따라 11일 만에 탄핵소추가 이뤄졌다. 여기까지는 속전속결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의 혼돈은 정치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능력이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둘러싼 논란은 명확한 규정이 없는 사안을 정치적으로 풀어낼 의지도 역량도 부족함을 드러냈다. 야당은 헌법재판관 임명에 반대한 한덕수 국무총리를 즉시 탄핵했다. 야당의 과속은 헌법재판관 2인 임명으로 겨우 멈춰 섰다.

우리 앞에 펼쳐진 무질서는 프랑스 혁명 직후를 떠올리게 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참수됐다. 정권을 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로 1만5000명이 처형됐다. 함께 혁명을 이끌었던 조르주 당통은 단두대에서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다음은 네 차례"라고 저주했다. 결국 자코뱅파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부딪혀 실각하고 로베스피에르 역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시민혁명은 덧없이 종언을 고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혁명 이후의 광기를 이성으로 통제할 시스템이 없었던 시절만의 이야기일까.

우리는 1987년 개헌 이후 벌써 세 번째 탄핵소추를 경험했다. 헌법에 의해 재임 중 기소되지 않는 대통령의 잘못을 파면으로써 처벌하는 유일한 통로이니 그 자체로 반드시 필요한 제도다. 그러나 반복된 탄핵은 극단의 정치를 배태했다. 개헌은커녕 선거구제 하나 바꾸지 못한 채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대통령은 법률안 거부권을, 야당은 탄핵소추권을 최대한 사용하는 극단의 정치는 이미 임계점을 넘은 상태다. 한국 정치는 절반이 넘으면 생사를 건 승부를 모두가 계속해야 하는 '오징어 게임2'의 실사판이 됐다.

다행히 계엄과 탄핵 사태는 다시 예정된 경로로 진입하게 됐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1987년 체제의 산물인 헌법재판소는 헌정질서의 복원과 수호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탄핵심판의 논점은 복잡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헌법과 법률을 위배했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피소추자가 권좌에 복귀했을 때 국민 신뢰를 회복하고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지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 미래의 대통령에게 같은 행위를 허용할 것인지의 가늠자이기도 하다.

비상계엄은 잘못이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집권을 피하려면 탄핵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려면 냉정한 분리 접근이 필요하다. 다수의 국민은 이제 차분히 탄핵심판의 결과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대선이 치러진다면 어떤 후보가 더 민주적인 지도자가 될 것인지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신헌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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