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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토)

[신년특별기고]이대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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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해마다 묵은해가 저물고 새해가 오면 소스라쳐 놀라는 느낌이 있다. 뒤를 돌아보아 우선적으로 세월이 가고 나이 먹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느낌으로 설레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나간 한 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새해에는 좀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 심리다.

이데일리

나태주 시인(사진=나태주풀꽃문학관)


그래, 좋다. 올해는 2024년이 가고 2025년. 그런데 2025년이라고 말하고 보니 느낌이 특별하다. 무언가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었다고 감격하던 우리가 2000년 다음에 맞은 새로운 세기 가운데 25년, 사반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대한민국, 지난해에도 많은 변화와 술렁임이 있었다. 좋은 일과 안 좋은 일. 어찌 사람이 살면서 좋은 일만 오로지 바라며 살 수 있을까? 우선은 한강 소설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있었다. 글 쓰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놀랍고 기쁘고 부러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국격을 높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벅찬 소식 앞에서도 우리는 흔쾌히 기뻐하고 축하해 주지를 못했다. 약간의 투덜거림이 있었고 외면이 있었다. 이런 점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젊은 친구들이 올림픽에 나가 고군분투하여 메달도 따고 대한민국의 국위를 드높인 일도 있었다. 그리고는 무슨 좋은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아도 별로 좋았던 일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어둡고 답답한 기억들만이 쌓인다.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행태가 마음에 걸린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길 ‘정자(政者)는 정야(正也)’라 하셨다. 말하자면 정치는 바른 것이고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가 과연 그런가? 온통 꼼수와 고집불통으로 맞선 것이 우리의 정치판 풍토였다. 과연 이래도 되겠는가? 그러기에 삼류정치를 넘어 오류정치란 말이 나돌고 있다. 국민 수준은 저만큼인데 정치는 뒷걸음쳐 퇴보하고 있다는 말이 있고 정치인들만 없으면 나라가 평안할 것 같다는 탄식이 나오는 판이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인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 그래도 정치인들은 우리 삶에서 가장 앞서가는 일을 하는 사람들 아니신가? 깃발 든 사람들, 선봉이 아니신가? 그런데 그렇게 앞서가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오만 불통, 방만하게 생각하고 세상을 온통 흩어놓으면 이 나라는 어쩌란 말인가! 뒤따라가는 힘없는 백성은 어쩌란 말인가! 새해에는 제발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신 좀 차려주었으면 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도 있고 부메랑이란 말도 있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도 있다. 오늘 방방 뛰도록 좋다 해도 그것이 빌미가 되어 다음날 족쇄가 되고 자승자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제발 정치하는 사람들이 겸손했으면 좋겠고 국민 무서운 줄 알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선거철만 알량한 미소로 사람을 속이고 선거가 끝나면 어깨에 힘을 주고 싹 돌변하는 저들이 나는 너무도 두렵다.

정치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이제 정신 좀 차리고 겸손해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남 생각해 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어차피 인간은 이기주의이고 개인주의가 기본이다. 하지만 더러는 다른 사람 입장도 생각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런 아량을 가져야 한다. 소중하고 급한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지만 다른 사람 없이 그 소중하고 급한 내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기에 그렇다. 제발, 제발 남 좀 생각해 주는 사람이 되자.

우분투(Ubuntu)란 말도 있다. ‘내가 있어 네가 있다’가 아니고 ‘네가 있어 내가 있다’이고 ‘우리가 있어 내가 있다’이다. 정말로 나 혼자서 어찌 우리이겠는가? 가까이는 우리의 조상 단군 임금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거룩한 말씀도 있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사람으로 살 수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며 사는 사람으로 살아서는 정말로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제발, 제발, 이제는 남 좀 생각해 주면서 살자. 나 혼자만 배부르고 등뜨시고 권력 있다 으스대는 소인배가 되지 말자.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앞서가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세상은 진정 오지 않는단 말인가! 두고 보자. 당신들 오늘의 오만과 이기심이 당신들에게 독이 되고 해가 될 날이 있을 것을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

독선(獨善)은 결코 선(善)이 아니다. 저 혼자만 잘나서 독선이고 저 혼자만 옳아서 독선이다. 나는 소나무를 무던히도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정원의 소나무 아래 다른 꽃을 심어 가꾸면서 소나무가 결코 좋아하기만 할 나무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도무지 다른 나무나 꽃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것이다. 심는 대로 죽거나 비들비들 시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나무를 베어버렸다. 소나무는 독선의 나무였던 것이다.

오늘 내가 푸른 소나무라고 당당하다고 자랑하고 뻐길 일이 아니다. 언젠가 밉게 보이면 둥치째 베어지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국민들, 백성들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어린 사람, 뒤따라오는 사람, 어리숙한 사람, 가난한 사람, 젊은 사람들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또다시 공자님은 ‘후생(後生)이 가외(可畏)’, 뒤따라오는 사람, 어린 사람이 충분히 두렵다는 말씀을 남기지 않았겠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좋아져서 잘사는 나라가 되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고 반짝이는 나라, 불 밝은 나라가 되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씨, 우리들의 정신 상태가 이래서는 안 된다. 어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자 떼로 몰려서 좋은 나라가 되겠는가.

요는 타인 배려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고 타인에 대한 환대다. 내가 문학강연 나가서 강연이 잘될 때는 강연을 주최한 사람들이 나서서 나를 환대하고 배려해 줄 때이다.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말이 풀려 강물처럼 흘러가는 강연이 된다. 배려의 힘이고 환대의 능력이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날들은 고집과 독선과 불통과 눈속임과 얌체와 꼼수의 시대가 아니고 배려와 환대의 시대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살아남을 길이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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