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쿠르트 괴델은 《타임》지가 '20세기 100대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수리논리학자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괴델은 1947년에 미국 시민권을 신청했다. 면접을 대비하면서 미국 헌법을 공부한 괴델은 큰 허점을 발견했다. 미국 헌법에 규정된 합법적 절차를 통해서 미국을 독재 국가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흥분한 괴델은 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과 게임이론의 선구자인 모르겐슈테른에게 자신의 '굉장한 발견'을 알렸다. 두 사람은 괴델에게 면접 때 절대 그 발견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괴델이 시민권을 받지 못하고 유럽으로 돌아가야 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괴델은 면접관에게 자신의 발견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다행히 면접관은 괴델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차렸고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괴델은 시민권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괴델이 발견한 미국 헌법의 시스템 다운 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헌법적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는 지금 1947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한 이유가 있다. 괴델이 발견한 것과 유사한 '대한민국 헌법의 시스템 다운 포인트'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 다운 포인트는 컴퓨터 운영체제 같은 시스템의 기능이 정지되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 하는 지점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 역시 이대로 지속되면 어느 시점부터는 정상적 헌정질서로 돌아갈 수 없는 교착상태가 발생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헌법재판소 6인 재판관 체제가 있다.
"1명은 선고 불가 의견"…SBS 단독보도의 의미
지난 12월 26일 SBS는 진행되고 있는 헌법적 위기 상황의 핵심과 관련된 팩트를 단독보도했다. 헌법재판관 세 자리가 공석인 상황에서 남아 있는 6명 재판관 중 1명이 '6인 재판관 체제에서는 파면이나 심판청구 기각 같은 종국결정을 선고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는 사실을 단독보도한 것이다. 비상계엄 사건 이전인 11월에는 선고 시점이 다가온 여러 사건에 대한 종국결정 선고를 헌법재판소가 실제로 시도했지만 해당 재판관의 이견 때문에 선고가 연기됐다는 사실도 SBS가 단독보도했다. 그동안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6명 체제에서도 사건 심리(심판 진행)가 가능하다는 입장은 여러 차례 밝혔지만 6명으로 종국결정까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이런 가운데 남아있는 헌법재판관 1명이 6인 체제 종국결정 선고에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는 사실, 헌재가 비상계엄 이전에 재판관 6명으로 종국결정 선고를 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지만 해당 재판관의 이견 때문에 선고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SBS 보도로 처음 알려진 것이었다.
SBS가 보도한 사실, 재판관 6명 체제에서는 종국결정을 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가진 재판관이 1명 있다는 사실이 지금 시점에서 왜 중요한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파면 결정이 선고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재판관 6명 전원이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의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재판관 6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헌법 113조 1항에 규정돼 있다. 헌법 조항이기 때문에 개헌 없이는 국회도 이를 변경할 수 없다. 만약 재판관 6명 중 1명이 '6인 체제에서는 파면과 같은 종국 결정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할 경우, 나머지 5명이 모두 파면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탄핵 결정 정족수에 미치지 못한다. 탄핵 심판 과정에서 피청구인이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위반한 행위가 확인되더라도 이와 무관하게 탄핵 결정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기 전인 지난 11월에 헌재가 정치적 색깔이 별로 없는 사건들에 대한 종국결정을 시도했지만 해당 재판관 이견 때문에 무산됐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6인 체제가 유지될 경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 선고가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
6인 체제 종국결정 불가론을 윤석열 대통령 측을 돕기 위한 보수적 견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정연주 전 성신여대 법대 교수는 진보적 성향으로 평가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권한대행은 헌법재판관을 즉각 임명하라〉는 칼럼에서 "종국결정은 헌재법 제23조의 취지와 대통령 탄핵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헌재 결정의 정당성과 설득력 확보를 위해 반드시 7인 이상의 재판부에서만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럴 때 헌재 결정을 비로소 국민들이 수긍할 것이며, 극도의 정치적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6인 체제 종국결정에 반대한 재판관이 밝혔다는 '헌법상 헌법재판관 구성의 1/3은 국회, 1/3은 대법원장, 1/3을 대통령에게 맡겨져 있는데, 이 중 국회 몫 1/3이 공석인 상황에서 종국결정까지 선고하는 것이 헌법정신과 합치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취지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이다. 해당 재판관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시점이 비상계엄이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을 예상할 수 없었던 지난 11월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6인 체제 종국결정 불가론을 다수설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정치적 상황을 감안한 해석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6인 체제'에서 1명의 이견…다가오는 시스템 다운 포인트
만약 재판관 6인 체제가 유지되고, 6인 체제 종국결정 선고 불가론을 폈던 재판관이 입장을 바꾸지 않아 내년 4월 18일까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선고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2025년 4월 18일에는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퇴임한다. 재판관이 6명에서 4명으로 또 줄어드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종국결정 선고뿐만 아니라 사건 심리, 즉 심판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윤석열 대통령 등 헌재에서 탄핵심판을 받고 있는 당사자 중 한 명이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재판관 4명 체제에 심리가 가능하도록 해 달라고 가처분을 신청할 수도 있겠지만, 정원의 과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명 재판관 체제에서도 심리가 가능하다고 헌재가 결정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 그렇게 되면 내년 4월 18일 이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은 절차가 정지된다. 최소한 2명의 재판관이 다시 임명될 때까지는 탄핵심판 절차가 재개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년 4월 18일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을 누군가가 한덕수 국무총리처럼 헌법재판관을 임명을 보류하거나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스템 다운 포인트가 발생한다. 탄핵심판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은 권한을 회복하지 못 하고 직무 정지 상태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파면 결정이 선고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 신분은 유지한다. 결국 내년 4월 이후로도 2년 넘게 남게 될 윤 대통령 잔여 임기 내내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탄핵심판 청구가 기각되고 대통령이 권한을 회복하는 경로든, 대통령이 파면되고 60일 뒤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는 경로든, 정상적 헌법 질서로 돌아가는 길이 2년 넘게 막혀 버리는 시스템 다운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한 가지 시나리오가 더 있다. 탄핵심판 절차 정지 이후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철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윤석열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탄핵소추를 철회하는 절차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돼 있는 것이 아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이를 선택할 가능성이 극히 작아 현실화되기 어렵다. 만약 국회가 절차 문제 때문에 탄핵소추를 철회했다가 윤 대통령이 형사재판에서 내란죄 유죄 판결을 받게 되면 헌정질서 혼란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도 있다.)
시스템 다운을 막는 방법, 헌법재판관 임명
정상적인 헌정 질서로 복귀하는 경로가 봉쇄되는 상황, 시스템 다운을 막기 위해서는 당장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 3명을 임명해 정상적인 9인 재판관 체제를 복원하면 된다. 9인 재판관 체제에서는 종국결정 정족수와 관련된 논란의 여지 자체가 없다. 재판관들 사이에서 이견이 발생하더라도 9명 중 6명 넘는 재판관이 동의한다면 파면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 반대로 탄핵에 동의하는 재판관 수가 6명에 미치지 못하여 탄핵심판 청구 기각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에도 사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헌법재판관 9명 체제를 복원하는 것이 정상적 헌법질서 회복이 불가능 지점, 시스템 다운 포인트 발생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어도 국회가 "선출"한 사람에 대해서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재판 임명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학계의 압도적 다수설이다. '여야가 합의해 오면 헌법재판관을 임명하겠다'는 한덕수 총리의 입장 자체도 사실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에 헌법적·법률적 문제가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여야 합의가 있다면 임명할 수 있다는 것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판관 임명권을 행사할 수는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임명의 전제가 여야 합의라는 주장은 헌법이나 법률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 표명에 가깝다. 대한민국 헌법 111조 3항에는 국회에서 "선출하는 자"를 대통령이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한다고 규정돼 있다. 여야가 합의한 자를 임명한다고 규정돼 있지 않다. 국회의 "선출"은 본회의 의결을 의미한다. 여야 합의가 아니다. 합의로 헌법재판관 후보를 선출하는 것은 아름다운 관행이지만, 합의가 없다는 이유로 임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레토릭일 뿐이다.
시스템 다운 방관하면 내전 상황 가능성
시스템 다운 포인트는 프로그램 설계자가 사전에 생각하지 못한 오류다. 그러나 시스템 다운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운영자는 없다. 우리는 이제 4가지 조건이 충족될 경우 대한민국 헌법 시스템이 다운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① 헌법재판관이 6명만 존재하는 가운데 대통령 탄핵심판이 시작되었는데,
②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해 공석인 재판관 자리를 채우지 않고,
③ 일부 재판관 이견으로 탄핵심판 선고가 미뤄지는 가운데,
④ 남아 있는 헌법재판관 중 일부가 추가로 퇴임하면서 6인 재판관 체제도 무너지는 상황이다.
4가지 조건의 충족과 시스템 다운을 막기 위해서 운영자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헌법에 정하고 있는 대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면 된다. 이를 거부해 시스템 다운 상황에 발생하면 정상적 질서 회복이 당분간 불가능해진다. 정치적 이견과 갈등이 광장에서 폭력적으로 맞붙는 사실상의 내전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아있는 헌법재판관 6명 모두가 각자의 성향과 무관하게 신속한 헌법재판관 임명을 요구하고 있는 이유, 압도적 다수의 헌법학자와 법률가들이 현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과제가 9명 재판관 체제의 복원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이유다.
괴델이 발견한 미국 헌법의 시스템 다운 포인트는 논리적 가능성일 뿐이었다. 우리에게는 불과 몇 달 뒤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위험이 됐다. 정상적 헌정질서 자체가 인질이 되고 국민 전체가 몸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당장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헌법재판관 9인 체제를 서둘러 복원해야 한다.
임찬종 기자 cjyim@sbs.co.kr
▶ 네이버에서 S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가장 확실한 SBS 제보 [클릭!]
* 제보하기: sbs8news@sbs.co.kr / 02-2113-6000 / 카카오톡 @SBS제보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