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성 사라진 정권의 위태로움 방증
짊어진 무게에 비해 가벼웠던 권한대행의 ‘책임 회피’ 결말
“美, ‘한국의 안정’ 원할뿐 현 정권 지지한다는 건 오산”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번지며 정세는 또 다시 요동치게 생겼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된 뒤 계엄·탄핵 정국이 수습 국면에 접어드나 했지만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6일 서울 총리공관에서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와 주요 미국계 외국인투자기업을 대상으로 열린 오찬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총리실 제공 |
국내 혼란이 가중될 것을 우려해 한 차례 탄핵안 발의를 보류했던 더불어민주당은 한 총리가 국회에서 선출된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하는 ‘선’을 넘자 더이상 지체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6일 한 총리 탄핵안 발의, 27일 탄핵안 가결이 신속하게 이뤄졌다.
윤 대통령이 직무 정지되며 대통령 대행 자리를 맡은 한 총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정상 공백을 메울 만큼 적극적이거나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란 관측이 나온 바 있다.
애초에 내란 혐의를 받으며 탄핵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 및 국무위원들이 갖는 권위의 한계가 분명하고, 전형적인 공무원 성향을 보여 온 한 총리 개인의 행보를 비춰봐도 책임지는 선택보다는 이런 무게를 떠안지 않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었다. 실제로 한 총리는 "여야 합의로 선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헌법재판관 임명의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을뿐 현재의 비상상황과 시급성이 주는 선택의 무게를 회피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20회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탄핵소추안 탄핵 의결 정족수 과반 151명이라고 밝히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뉴스1 |
◆“대행체제·민주적 절차 지지” 국제사회의 진심은 ‘현 정권 신뢰’ 아냐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평론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외교 원칙이다. 이에 따라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각국은 한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놀라움과 충격을 표현하면서도 정부 공식으로는 직접적인 반응을 자제해왔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한국의 민주적 절차, 회복력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한 총리가 대행이 된 뒤로는 대행체제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국제사회가 지금의 어려움에 대응하고 있는 한국을 지지한다고 한 것은 진위를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정부와 국민의힘이 이를 두고 “한 총리 체제(현 정권)를 지지한다”고 해석하는 건 아전인수 격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대통령이 탄핵안 가결로 직무 정지되며 헌법적으로 국무총리가 대행을 맡게 된 것을 보며 ‘민주적 절차가 가동되는 시스템’에 대한 지지와 혼동해선 안된다는 설명이다.
현 정권으로서는 사실상 윤 대통령이 평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순간 법치주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이를 발휘할 권위와 권능을 스스로 내던졌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국내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해외에서 보는 시선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현재의 국무위원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 후폭풍을 수습한들 ‘내란 동조’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보니 타국이 100%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란 이유에서다. 이들 입장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자유민주주의 대표국’으로서의 신뢰를 내던진 이들이 정리되고, 믿을 수 있는 지도부와 새출발하기 위해 일시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대행을 맡은 총리가 몇 개월이나 있을지 모르는 등 너무나 불확실한 상황에서 국내든 국외든 그의 권위를 사실상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예전 박근혜 대통령 때는 개인의 잘못이었다면 지금은 국무총리가 함께 내란 혐의를 받고 있으니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도 하다”고 꼬집었다.
전 교수는 “현 상황에서 정부 여당이 권한대행과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을 국민이 납득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190석을 가진 민주당이 혼자 하려 해도 행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총리 탄핵 역시 정치권과 정부가 협의체를 만들고 협치하는 방향에서 더욱 어긋나 해법을 못 찾은 채 나라를 더욱 가라앉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멍이 크게 난 배를 수리할 생각은 없고 각자 유불리만 따지며 시간을 버리고 있다는 비판이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과 국무위원들이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탄핵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국가 신용도 유지’가 현 정권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는 큰 착각
앞서 총리실 관계자는 한국이 국가 신용 위험도를 나타내는 CDS 프리미엄 지수가 30대 중반에서 흔들리지 않고 지탱되고 있다며 현 대행 체제에 대한 신뢰를 방증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다소 번지수가 틀린 분석이란 지적이 나온다.
전 교수는 “다들 망하고 나서야 망했다고 한다”며 “한국은 아직 살찐 곰처럼 먹을 만 하니까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더 주목할 경제 지표는 환율이다. 1450원까지 오른 환율은 2008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인 수준이다. 1200∼1300원대여야 할 환율이 1500원 가까이 가는 상황은 분명 위기라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처럼 지정학적 위기가 상존하는 나라에서 이런 불안정성은 외교안보적으로 너무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언제든 이런 국내 상황의 취약함을 노린 외부 공격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지만, 다행히 동북아 지역에 확립된 지정학적 견제와 균형 및 세계 도처에서 이미 진행 중인 전쟁으로 여력이 없기에 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 교수는 “외세의 공략이 없는 것은 천운에 가깝고, 그나마 국민과 기업의 힘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비상상황을 정부가 자기들 공이라고 한다면 정말 크게 잘못된 판단”이라며 “국가를 잘 운영하라고 막대한 권한을 위임한 것이지 겨우 망하지 않게 버티게 해달라고 준 게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믿을 건 성숙한 시민뿐…‘정치 리스크’ 상징 된 한국 떠받치는 힘은
최근 개봉한 영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이 나라 사람들은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 대사가 회자되고 있다. 계엄·탄핵 정국에 맞선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는 현재의 시국과 맞아떨어져서다.
여기에 더해 아직은 한국 경제와 기업 자체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해외에서도 한국 대기업, 산업계와 거래를 지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4년에 느닷없이 대통령의 선포로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 민주주의 후퇴의 위기일발 상황은 대한민국에 대한 세계의 이미지를 한순간에 망쳐놓았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겨우 회복해 온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재차 현실화했을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투자나 외교 시 ‘정치 리스크’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오명을 씌웠다. 붕괴는 순식간이지만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쌓아올리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단 6시간 동안의 계엄으로 “한국 외교의 70년 공든 탑이 무너졌다”(조태열 외교부 장관)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계엄 사태 이후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반복해 강조하고, 한 총리 대행 체제를 지지한다고 밝힌 미국이 진짜 원하는 것은 특정 정당이나 현 정권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한국의 안정화’일 것으로 예상된다.
전 교수는 “미국에게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베이스로 반드시 필요한 나라”라며 “이 나라가 혼돈의 상태에 빠지면 자신들의 부담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누구든 힘과 권한 있는 사람이 안정화하길 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서 현재 행정부의 권위가 사라진 것은 중차대한 부분이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협치를 실험할 기회를 살려 대외적 안정성을 보여주거나 수개월 안에 있을 대통령 선거로 새 정부가 들어오는 것 등이 현재로서는 안정을 위한 길이다. 여야 대립만이 부각되고 있는 지금, 전자의 경우 좀처럼 답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전 교수는 “미국은 형식적으로 대행 체제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걸 두고 ‘미국이 나를 인정하고 밀어준다’고 여기는 건 부적절하다”며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그런 정치 개입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미국”이라고 말했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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