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
시리아에서 2대에 걸친 54년 독재정권이 지난 8일 이슬람 수니파 무장 조직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주도하는 반군에 의해 붕괴했다. 수도 다마스쿠스의 북한대사관은 며칠 동안 보안 문서를 소각했다. 러시아로 급히 망명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정권의 몰락과 함께 화염에 휩싸인 것은 북한의 보안 문서뿐이 아니었다. 북한의 대외 전략도 한 줌의 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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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 남은 우방은 중·러·이란뿐
위기에 이들이 얼마나 도와줄까
우크라이나 추가 파병 딜레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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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는 북한의 몇 개 남지 않은 오랜 우방국이었다. 김정은과 아사드는 정기적으로 서한을 주고받았다. 2023년 말 북한이 대부분의 해외 공관을 철수하고 손에 꼽는 몇몇 주요 우방국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다마스쿠스의 7층짜리 북한 대사관 건물은 건재했다. 그러나 시리아 새 정부는 아사드 정부와는 달리 북한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다. 해외 공관 네트워크 축소라는 결정에 뒤이어 일어난 아사드 정권의 몰락은 북한의 외교력에 큰 타격을 준 셈이다.
이제 북한 정권의 불안한 눈빛은 또 다른 우방국인 이란을 향하고 있다. 경제 악화, 2년 전 전국적 시위, 중동의 친이란 세력 몰락,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선 적절한 대응 실패, 아사드 정권의 몰락으로 고립된 이란도 여차하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북한에 남은 우방국은 중국과 러시아뿐이다. 북·중 관계는 친러 밀착 행보 이후 냉각됐고, 유사시 과연 중국이 어느 정도까지 대북 지원에 나설지도 의문이다. 2019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오마르 알바시르 전 수단 대통령과 2011년 대규모 시위 와중에 피살된 무아마르 알 카다피 전 리비아 지도자의 몰락 사례에서 보듯 중국은 우방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차 없이 손절매한 이력이 있어서다.
이번에 러시아도 위기에 빠진 우방국을 버렸다. 1980년 옛 소련과 시리아가 맺은 우호 조약 제6조에 따르면 러시아는 안보 위협으로부터 시리아를 지켜주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반란 세력 기지를 일부 폭격하긴 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곧 군 철수에 집중했다.
지난 6월 북·러 조약이 체결됐을 때 북한 정권은 북·러 동맹이 북한의 안보 문제를 즉시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조약에 명시된 상호 군사 지원은 옛 소련과 시리아의 조약보다 훨씬 명확하다. 그러나 실제 유사시에 얼마나 다른 결과로 이어질지는 분명하지 않다. 북한은 확신할 테지만 시리아 사태를 본 이후에도 과연 그럴까.
철석같이 믿었던 안보 협력국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 북한은 군대에 더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사드 정권 붕괴는 북한에 시사하는 것이 많다. 아사드 정권은 반란군의 힘이 커서가 아니라, 누구도 아사드 정권 수호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몰락했다. 이란과 러시아도 나서지 않자 시리아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형편없는 군인 월급과 보급품, 만연한 부패로 사기가 떨어진 시리아군은 아사드 정권의 호화로운 생활을 보며 분노했다. 이처럼 북한 지도부는 정권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군대가 시리아군과 다르게 행동할지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 정권엔 러시아 파병도 부담이다. 파병 초기에는 외국으로 나간다는 생각에 들뜬 군인도 있었겠지만 척박한 환경과 사상자 급증으로 파병된 북한군은 분노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시리아 사례에서 보듯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별다른 소득은 없으면서 대가는 크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러시아는 내년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까지 최대한 많은 우크라이나 영토 확보를 위해 북한군의 추가 파병을 요구할 것이다. 북한은 트럼프가 취임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금방 종식돼 추가 파병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승전을 굳게 믿으며 평화 협상에는 관심이 없다. 평화 협상 노력이 퇴짜를 맞으면 트럼프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계속 지원할 것이고 전쟁은 좀 더 지속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크게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은 러시아의 추가 파병 요구를 거절할 위치에 있지 않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실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북한 지도부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이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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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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