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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이 개봉 이틀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겨울 마지막 대작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얼빈'은 개봉 첫날인 지난 24일 전국 38만 명을 모은 데 이어, 크리스마스였던 이튿날 84만 명을 모았다. 이는 '아바타: 물의 길'(이하 '아바타2')이 크리스마스 당일 모았던 일일 관객 수(77만 명)를 제친 기록이자 팬데믹 이후 크리스마스 당일 기록한 최고 관객 수다.
개봉 전 흥행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던 영화였지만 보란 듯이 성적을 내고 있다. 다만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고 있다. 영화적 미학에 대한 감탄이 쏟아져 나오는 한편 오락적 재미가 떨어진다는 의견도 적잖다.
우민호 감독은 '남산의 부장들'(2020)을 끝내고 제작사 하이브 미디어 코프의 김원국 대표로부터 '하얼빈'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처음엔 거절했다. 근, 현대사의 악인을 주로 다뤄왔던 우민호 감독에게 손댈 곳이 거의 없는 '안중근'이라는 영웅적 인물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을 터. 그는 서점에서 안중근의 전기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안중근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 후 창작자로서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민호 감독은 인터뷰 자리에서 "안중근 장군의 자서전을 읽고 독립군들의 노고와 희생, 헌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뭔가가 끓어올랐다. 독립군들이 그 거사를 치렀을 때 나이가 30대 초반이라는 것도 놀랐다. 제겐 그 시대, 그 거사가 굉장히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를 오락물로 찍을 순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연출을 안 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2년 전 윤제균 감독은 '영웅'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지만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안중근 관련 문화 콘텐츠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게다가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320만 명이 관람했다. '하얼빈'은 '영웅'이라는 뮤지컬과 영화 그리고 동명의 소설(김훈 作)까지 무수한 안중근 콘텐츠와 차별을 둬야 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다. 감독이라는 지위는 그 선택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수장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영화는 흥하기도 망하기도 한다. '내부자들'로 800만 흥행 감독 대열에 오르기 전까지 우민호 감독은 두 편('파괴된 사나이', '간첩')의 영화로 큰 실패를 맛봤다. 몇 번의 실패 속에서 우민호 감독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감독이자 작가로서 개성을 획득해 나가는 법을 배웠다.
'하얼빈'은 뻔한 길로 가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투영된 작품이다. 다만 그 노력이 대중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지는 계속된 평가를 받아봐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가장 많이 들 궁금증에 대해 감독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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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의도적으로 카타르시스 배제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하는 '하얼빈역 거사'다. 관객들은 느리고 어둡고, 진중한 서사를 참으며 '하얼빈역 거사'가 선사할 카타르시스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민호 감독이 연출한 '하얼빈역 거사'에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부감(俯瞰: 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보며 촬영하는 것)으로 찍어 현장의 분위기도, 안중근과 이토 히로무비의 얼굴도 담지 않았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 샷으로 찍은 이 장면은 '하얼빈역 거사'가 작은 소동처럼 보인다. 왜 그랬을까. 우민호 감독은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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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제 고집이었다. 물론 주변의 만류가 많았다. '(배우)얼굴이 없(안 나오)냐'고 하더라. 없다고 했다. (안중근이 이토에게 다가가기 전까지 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냐고 묻자) 실제로 그 당시 아무도 안중근을 저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뭐지?' 하다가 '어...어....어!'하게 된 상황이었달까. 마치 우리 앞에 코끼리가 나타났는데 눈치를 못 채다가 '앗! 코끼리다!' 하는 것 같은 거다. 초현실적이지만 (하얼빈역 거사가)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부감으로 찍은 것은 먼저 간 동지들이 이 거사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부류의 장면에서 생각하는 신파적 분위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자극하려고 했으면 이 장면에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찍고, 후반부엔 조마리아 여사도 등장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에는 '먼저 간 동지'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독립군들이 하얼빈으로 향하는 여정에는 영화에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 이름 모를 사람들의 희생을 영화는 강조한다. "먼저 간 동지들을 대신해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라는 우덕순의 대사와 "먼저 간 동지가 도울 겁니다"라는 공부인의 대사를 통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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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출연의 좋은 예vs나쁜 예, 왜 정우성이어야만 했을까
영화에는 두 명의 배우가 특별 출연했다. 독립군 '이창섭'역을 연기한 이동욱과 독립군에서 마적이 된 '박점출'역의 정우성이었다. 두 카메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동욱의 경우 주인공에 맞먹는 존재감과 활약을 펼쳤다는 호평이 많지만, 정우성의 경우 극의 톤 앤 매너에 맞지 않은 연기로 흐름을 깬다는 의견이 더 많다.
우민호 감독은 이동욱의 캐스팅에 대해 "원래 이동욱 배우를 좋아한다. '타인은 지옥이다'를 아주 재밌게 봤고, 그 작품 속에서 이동욱 씨의 연기에 반했다. 어쩌다 저녁을 먹게 됐는데 실제로도 매력 있더라. '이 배우랑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단번에 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정우성에 대해서는 "꼭 정우성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그 역을 하기 위해서는 배우가 몽골까지 직접 왔어야 했다. 그 한 장면을 위해 몽골 울란바토르까지 비행기를 타고 6시간을 와야 했고, 거기에서도 촬영지까지 차로 1박 2일 비포장 도로를 달려와야 했다. 그 고난의 여정을 견딜 배우가 정우성 밖에 없었다. 그는 이 대본의 의미를 알고,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고마웠다"라고 답했다.
박점출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도 애정을 드러내며 "길을 잃은 독립운동가랄까. 한때 독립운동을 했지만 길을 잃어버린 거다. 실제로 그 시절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더라. 나라의 독립도 요원하고, 밥벌이도 안 되다 보니 마적질을 하게 된 거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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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영화에서 가장 잘된 캐스팅으로 꼽히는 릴리 프랭키의 출연해 대해서는 "의외로 어렵지 않게 캐스팅 됐다. 워낙에 명배우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작품('어느 가족')도 하시지 않았다. '쉽지 않겠지'하면서 시나리오를 보내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드렸는데 선뜻하겠다고 답이 왔다. 제 작품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을 재밌게 봤다더라. 언론시사회 당일 영화를 직접 보러 오셨다. 마치고 삼계탕을 대접해 드렸다"고 미소 지었다.
릴리 프랭키는 존재감에 비해 분량이 많지는 않다. 촬영 회차 역시 2~3회차 남짓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존재감과 임팩트는 상당하다. 특히 "내가 왜 조선 합병을 계속 미뤘는지 아나? 조선이란 나라는 수백 년간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왔지만,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다.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라는 대사는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장면은 예고편에도 쓰였다.
우민호 감독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다. 실제로 이토가 마차를 타고 조선 저잣거리를 다닐 때 민초들의 범상치 않은 눈빛을 보며 꺼림칙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더라. 거기에 착안해 만든 대사"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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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 장면의 의미들...'하얼빈'의 밀정은 달랐다
영화에 스릴러적 재미가 발생하는 건 중반 이후 드러나는 '밀정'의 존재 덕분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는 실제로 밀정들이 있었다. 앞서 제작된 영화 '암살'(2015)과 '밀정'(2016)에도 주요 캐릭터로 등장해 영화의 재미에 크게 일조했다.
두 영화의 밀정과는 조금 다르다. 캐릭터 자체도 다르고 그를 대하는 감독의 시선도 조금은 다르다. 단순한 '내부의 적'이나 '응징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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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의 밀정은 '암살'의 밀정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리 영화 속 밀정은 좀 나약하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일본이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를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나온다. 가까운 예로 우리가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었을 때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지가 갑자기 남산으로 끌려가 거의 죽을 고문을 당하고 변절자가 돼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는 그런 무지막지한 고문 앞에서 과연 견딜 수 있었을까'라는 자문해 보면 신념을 지키는 사람도 있고 못 지키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그 변절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건 쉽지 않다. 물론 거기엔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었을 거다. 후반에 그의 손가락이 잘려져 있는 걸 보셨나?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그의 철저한 자기반성이 관객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영화에서 밀정의 과거 장면은 흑백으로 나온다. 일본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장면보다 와닿았던 건 일본 순사가 건네주는 고깃덩어리는 받아먹는 장면이다. 한 번은 포크로, 두 번째는 손으로 받아먹는다. '일본의 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나약함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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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에 의도한 거리두기 "어둠 속 고뇌, 담고 싶었다"
'하얼빈'은 '영웅 안중근'이 아닌 '인간 안중근'을 조명한다. 그러나 인간 안중근의 내면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엿보는 느낌이 강하다. 이는 감독의 의도된 거리두기 때문이다.
우민호 감독은 "단순한 영웅이 아니라 하얼빈에 가기까지의 번뇌, 번민, 고뇌를 담고 싶었다. 그래서 현빈 씨의 대사보다는 눈빛을 강조하고 싶었다. 어둠 속에 갇혀있는 고뇌를 표현하려면 눈빛이 중요했다. 강해 보이지만 어떨 때는 처연하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까지 담고 싶었다.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군들이 느꼈을 고뇌와 번민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싶진 않았다. 좀 떨어져서 봐야 더 숭고하게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후반부 현빈의 내레이션은 안중근이 했던 말을 기반으로 만들었다. "그걸 꼭 쓰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불을 들고 가야 한다'는 말은 내가 만들었다. 그 말을 통해 관객들이 힘을 얻고 위로를 얻길 바랐다. 이번뿐만 아니라 나중에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도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썼다. 그게 안중근 장군과 독립군들이 우리 후대에 바라는 바가 아닐까. 그분들이 밑거름 돼 다음 세대인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더 단단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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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호 감독은 '악당 마스터'다. '내부자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에서 그는 악인을 입체적이고 다이내믹하게 그리는데 역량을 발휘했다. 그런 그가 '민족의 영웅들'을 그렸다. 모든 과정이 끝난 그에게 소회를 물었다.
"선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그리는 게 더 힘든 것 같다. 악당들은 좀 이상하지 않나. 안 좋은 것은 상상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분(독립군)들의 마음은 진심이지 않나. 왜곡되면 안 되니 힘든 거다. 특히 실존 인물, 독립군들의 모습과 마음이 자칫하면 왜곡될 수 있으니. 이런 걱정을 하면서 찍었다. 내가 했던 작품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수십 번 생각했다. 이 길이 맞는 건지."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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