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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계엄 사태 속, 과학자이자 지식인들에게 ‘정치 중립’은 가능한가[최정균의 유전자 천태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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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과학자는 정치적이어야 한다

경향신문

흔히 과학은 사실의 영역, 정치는 가치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은 가치 판단을 포함하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과학이 만들어내는 산물은 정치의 대상이 된다. 과학자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강요받거나 스스로 정치에 거리를 두면서 과학의 결과물이 그야말로 ‘정치적’인 이들의 손에 들어가도록 방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사진은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정치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장면이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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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물리학자들,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 가지고 ‘대량살상무기 개발’ 비윤리적 프로젝트 참여
‘프로젝트’는 성공했지만…오펜하이머와 물리학자들의 정치적 결정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 그 판단은 결국 사회와 역사 몫으로 남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습기살균제 참사 조사 등서 보듯 과학은 늘 딱 떨어지는 답 주지 않아…과학은 가치 판단 포함한 정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
과학이 ‘사회 차별·피해’ 외면한다면 과학이 이룬 결과물 ‘정치가 이용하도록 방조’하는 결과 낳아…이 시대 과학자는 ‘정치 주체성’ 가져야 한다

올해 2월, 카이스트 교수협의회는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졸업식장에서 학생이 강압적으로 끌려나간 사건에 대한 입장문을 준비했지만 전체 교수 과반의 동의를 얻지 못해 발표를 포기했다. 그리고 10개월 후, 계엄 사태를 맞아 이번에는 교수 439명이 동참한 시국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지난 졸업식 사건에 침묵한 데 대한 자성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반발도 있었고, 학교 본부는 ‘카이스트신문’이 준비한 계엄 사태 특집호에 대해 해당 내용이 학교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정치적 중립성을 논하는 범위를 벗어난 문제다. “제가 정치인인가요? 목소리를 왜 내요”라고 한 어떤 연예인은 “시민으로서 기초 소양이 부족하다” “한국인으로서 자격도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이라는 교수들이 중립성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프레임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이라는 그림자 속에 안주하며 … 학생들에게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잘못을 통렬하게 반성한다.” 포스텍 교수들의 시국선언 내용이다.

좁은 의미에서 정치란 국가의 통치를 위해 권력을 획득, 유지, 행사하는 행위다. 이러한 권력은 한정된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이해관계의 충돌과 갈등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자원의 배분에는 반드시 가치 판단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철학자 미셸 푸코는 권력에 대해 더욱 광범위한 개념을 제시했다. 그것은 국가라는 기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속 도처에서 인간이 관계를 맺는 모든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권력의 이러한 개념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 미생물 심지어 세포들까지 제한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이들의 생존번식 경쟁에 정치적 속성은 필연적이다. 암세포의 경쟁적 성장, 병원균과 면역세포의 싸움, 먹이사슬의 먹고 먹히는 관계, 수컷들의 서열 다툼, 짝짓기와 같은 원초적인 행위들도 정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화란 생명체들의 정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본성 역시 진화의 산물이므로, 인간이 관계 속에서 내리는 모든 의사결정 과정은 진화를 통해 획득된 정치적 본능을 토대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의 활동도 예외일 수 없다. 과학자들은 함께 연구하기도, 서로를 배척하기도 하며, 학파를 만들기도 한다. 연구비의 분배를 놓고 이루어지는 경쟁은 이들의 일상이다. 심지어 과학 이론의 확립도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절대적 진실에 다다를 수 없다. 사실 인간의 뇌는 탐구를 위해 진화하지 않았다. 과학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때, 그 말은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을 향해 끝없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검증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 즉 정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한 덕분에 과학이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은 현실 세계를 근사적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발전시켜나간다. 추상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답을 찾는 수학과는 다르다. 과학의 발전 과정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다. 쿤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특정 패러다임 아래에서 연구 활동을 하는데 이것을 ‘정상과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 이것은 붕괴된다. 이에 관해 케임브리지대 과학철학과 장하석 교수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새로운 것이 대체해버리는 단절적인 혁명은 장기적인 과학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여러 패러다임을 공존시키며 서로를 보완적으로 발전하게 하는 다원주의를 제안한다. 마치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이 모두 동시에 유효한 현대물리학처럼 말이다. 이러한 다원주의 원리는 미시적으로는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 하나의 관찰 결과를 두고도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해석의 유동성은 정치적 가치 판단의 여지를 허용한다.

리처드 르원틴은 유전학자이자 과학이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 사회운동가로 유명했다. 실제로 우생학이라는 이름으로 생물학이 정치적으로 악용된 역사도 있다. 르원틴은 인간의 행동을 유전자로 환원하는 사회생물학을 학문적으로 반박하려 했고 심지어 시민단체들과 손잡고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72년 그가 발표한 논문은 17개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인종 간에는 유전학적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담았다. 인종 내 차이가 인종 간 차이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유전체의 크기를 생각할 때 17개는 너무나 적은 개수다. 최신 DNA 분석 기술로 많은 변이를 동시에 사용하면 인종을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르원틴의 논문은 틀렸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유전학적으로 인종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인종 간에 유의미한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유의미한 생물학적 차이’라는 것은 정의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는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르원틴이 인종차별을 부정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데이터를 해석한 것 역시 과학적으로 수용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반면 동성애 차별 문제는 어떠한가?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라는 진단명을 삭제한 것은 거의 50년 전이며,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질병 부문에서 삭제한 것은 1990년으로서 무려 34년 전이다. 동성애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과학적 증거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있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쌓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정권이나 종교계 등에서 일삼는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이나 차별에 과학자들이 저항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르원틴이 살아 있었다면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학은 늘 정량적이기 때문에 사회가 원하는 딱 떨어지는 답을 주기 힘들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안전성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서는 많은 전문가들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만들어졌다. 안전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데이터가 부실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비판도 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가진 정치권력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조사 결과를 기록한 <재난에 맞서는 과학>에서도 이야기하는 바다. 역학조사와 독성학 연구 등을 통해 전문가들은 유해성에 대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봤지만, 재판부나 정책결정자들은 100% 확실한 인과관계를 요구했다. 이런 수준의 확신은 신앙이지 과학이 아니다. 어쩌면 과학자들의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피해자들이 아닌 대기업의 손을 들어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다.

이와 같이 과학은 가치 판단을 포함하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과학이 만들어내는 산물은 정치의 대상이 된다. 이스턴이 말했듯이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는 정치의 주된 과제다. 과학이 정치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자원 중에 자연 그대로의 것은 공기가 거의 유일하다. 우리가 소비하고 활용하는 거의 모든 자원은 과학기술의 손으로 가공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선점은 곧 정치권력이 된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다론 아제모을루의 최근 저서 <권력과 진보>는 권력이 어떻게 기술 발전의 방향을 결정짓는지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다. 지난 1000년간 기술 진보의 역사는 그 성과물이 사회 전체의 번영이 아닌 일부 특권층의 혜택으로 돌아간 사례들로 가득하다. 가장 최근의 예가 정보기술(IT)이다. 1960~1970년대의 개발자들은 모든 정보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해커 윤리와 IBM과 같은 거대 기업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다. 대표적으로 개인용 컴퓨터 개발을 이끈 리 펠젠스타인은 엔지니어면서 정치 활동가였다. 컴퓨터를 인간 해방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그는 정부나 대기업의 장악력을 깨뜨리고 컴퓨터의 사용을 민주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1970~1980년대를 휩쓴 신자유주의 물결에 이들의 꿈은 사라졌다. 오직 돈을 목표로 했던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필두로 많은 기업들이 자동화라는 명목하에 인간의 노동을 박탈하고 자본가의 부의 축적만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IT의 뒤를 잇는 바이오산업은 어떻게 펼쳐질까? 아제모을루는 과학 발전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사례로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연구를 들었다. 푸코는 근대 이후 정치에서 인간 생명의 관리가 권력의 핵심 문제가 되었다는 점을 간파했다. 생명과학과 의학은 ‘시간’이라는 자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즉 이 분야의 기술은 인간이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준다. 생물학적 불공정은 대단히 심각해서, 누군가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을 배당받지만, 누군가는 아주 어린 나이에 혹은 한창 인생을 꽃피울 시점에 삶을 마감해야 하고, 누군가는 평생을 장애와 싸우는 시간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므로 연구 분야의 설정에 있어 이러한 공정성의 측면을 고려할 수 있다. 퇴행성 질환을 연구한다면 누군가의 건강수명을 60년에서 80년으로 늘릴 수 있겠으나, 치명적인 유전질환을 연구한다면 다른 이의 수명을 5년이 아닌 60년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만 충실한 정치적 결정은 희귀한 유전질환보다는 많은 사람이 겪는 질병에 많은 투자를 하게 할 것이다.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개발하지 말 것인가야말로 과학자가 내릴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결정이 될 수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해 미국이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기여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이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유대인 물리학자들이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이라는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은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러한 필요성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맨해튼 프로젝트는 과학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오펜하이머와 동료들의 정치적 결정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와 같이 과학적 올바름은 과학 그 자체가 말해줄 수 있지만, 정치적 올바름의 판단은 결국 사회와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르원틴, 펠젠스타인, 오펜하이머와 같이 탁월한 전문성과 정치적 리더십을 겸비한 과학자들이 존경받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연구 분야의 세분화, 전문화와 함께 과학자들은 점차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거리를 두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기능인으로 전락했다. 과학적 관찰을 토대로 내리는 가치 판단과 과학적 산물로써 자원의 배분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정치 과정에 대한 주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차별이나 피해에 대해 과학의 변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과학의 결과물이 그야말로 ‘정치적’인 이들의 손에 들어가도록 방조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바가 아니라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보다 주체적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시대가 과학자에게 요구하는 책무이기 때문이다.

최정균 교수

경향신문

카이스트 교수로 2009년부터 재직하며 인간유전체학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목표는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유전학적 원인 규명과 진단 및 치료기술 개발이며, 진화론을 접목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아산의학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선정 과학기술인상을 포함해 여러 학회의 학술상을 수상하였고, 과학기술한림원 선도과학자,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에 선정된 바 있다.


최정균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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