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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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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3총리 내각’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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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총리는 직업 정치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위다. 국가원수로서 국왕 또는 대통령이 있지만 이렇다 할 권한이 없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총리를 지냈으면 정계와 공직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게 순리일 법한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원조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에서 2023년 11월 보수당 정부의 외교부 장관에 임명된 데이비드 캐머런(58)이 대표적이다. 그는 2010년부터 6년 넘게 보수당 내각을 이끈 총리 출신이다. 전직 총리가 급을 낮춰 장관으로 입각하는 것이 본인도 조금 민망했던지 “6년간 총리로 일한 저의 경험이 국제사회에서 영국이 직면한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취임의 변을 밝혔다. 하지만 올해 7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패해 정권교체가 이뤄지며 캐머런의 외교장관 임기는 고작 8개월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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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프랑수아 바이루 신임 총리. 사진은 마크롱이 대선 후보이던 2017년 4월 마크롱 지지를 선언한 바이루와 함께 선거 유세를 하는 모습.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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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의 아소 다로(84) 고문은 아베 신조(2022년 사망)와 스가 요시히데(76) 두 전직 총리 밑에서 오랫동안 부총리 겸 재무성 장관을 지냈다. 2012년 12월 집무를 시작해 2021년 10월 내각을 떠나 자민당 부총재로 옮겼으니 그 기간이 장장 9년에 달한다. 그런데 이처럼 만년 ‘2인자’ 이미지가 강한 아소가 ‘넘버1’이었던 적도 있다. 2008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년 남짓한 기간 총리를 역임한 것이다. 총리까지 지내고 나이도 70세를 훌쩍 넘긴 아소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아베·스가 두 총리를 상사로 모신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총리를 1년밖에 못한 것이 아쉬워서였을까. 비록 부총리이긴 하나 재무장관 자리가 워낙 실세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훗날 일본인들 사이에 아소는 ‘전 총리’보다는 ‘전 부총리’로 더 널리 기억될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패망하며 사라진 프랑스 제3공화국을 대신해 종전 이듬해인 1946년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공화국 숫자는 달라졌으나 총리와 내각이 수시로 바뀌는 헌정 불안은 고스란히 이어졌다. 1952년 3월 중도 성향의 앙투안 피네(1891∼1994)가 총리에 올랐다가 1년도 채 안 된 1953년 1월 물러난 것은 의원내각제 시절 프랑스가 앓던 고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1958년 4공화국은 붕괴하고 강력한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한 제5공화국 성립이 가시화했다. 피네는 5공화국 초대 대통령 취임이 확실시되는 샤를 드골(1890∼1970) 장군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전직 총리 출신 인사로는 이례적 행보였다. 드골은 피네에게 입각을 제안했고, 피네는 이를 받아들여 드골 밑에서 1958∼1960년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드골과 거의 동년배인 피네에게 다시 총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드골은 1960년 이후 그에게 다른 공직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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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발스 신임 프랑스 해외영토부 장관(왼쪽)과 엘리자베트 보른 교육부 장관. 두 사람은 총리까지 지낸 거물급 인사이나 최근 새롭게 꾸려진 프랑스 내각에 장관으로 자리를 낮춰 합류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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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과 같이 여소야대 정국에서 혼돈을 겪는 프랑스에 새 내각이 들어섰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최근 임명한 프랑수아 바이루 신임 총리는 22일 조각을 마치고 장관들을 임명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각료들은 마누엘 발스 해외영토부 장관과 엘리자베트 보른 교육부 장관이다. 두 사람은 앞서 총리를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발스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밑에서 2014년 4월~2016년 12월 총리를 역임했다. 보른은 2022년 5월 마크롱에 의해 총리로 발탁돼 올해 1월까지 일했다. 전직 총리들이 스스로 장관으로 급을 낮춰 입각한 셈이다. 바이루 총리까지 더하면 프랑스 새 정부를 ‘3총리 내각’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행정 분야의 경륜에 정치적 감각까지 갖춘 노련한 인사들을 중용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현 총리와 전 총리들 간에 자칫 자존심 다툼이 일어나진 않을까 걱정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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