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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수)

[뉴스룸에서] 닉슨과 트럼프, 염치와 뻔뻔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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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21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선 패배 불복'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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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년 미국 대통령제 역사 46명의 대통령 중 앤드루 존슨, 리처드 닉슨, 빌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등 4명은 오명을 남겼다. 실제 탄핵소추안이 하원까지 통과되거나 통과 직전의 궁지에 몰렸던 역사 때문이다.

이 중 두 대통령의 경우가 많이 회자된다. 1972년 6월 미국 수도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던 민주당 본부에 공화당 소속 닉슨 대통령 재선 지원 조직이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됐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수많은 영화와 도서에 등장했던 장면이다.

처음에는 단순 절도 사건으로 묻히는 듯했지만 미 연방수사국(FBI) 내부 고발자 제보와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 추적 보도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닉슨이 수사 당국 압박, 거짓 해명 등 사건 은폐를 시도하면서 여론은 악화했다. 결국 여당 의원들까지 돌아서면서 탄핵소추가 추진되자 그는 스캔들 2년여 만에 자진 사임했다.

닉슨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했지만 처신은 달랐던 인물이 트럼프다. 그는 2019년 우크라이나 스캔들, 2021년 1·6 워싱턴 국회의사당 폭동 ‘내란 선동’ 등의 이유로 두 차례나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됐다. 특히 두 번째 탄핵은 2020년 대선 패배 불복, 부정선거 주장, 대선 확정 절차 방해를 위한 극렬 지지자 선동, 창문을 깨고 침입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유린, 5명이 숨지고 1,500여 명이 기소되는 등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현실과 분노가 반영된 결과였다.

미국 사회는 물론 민주주의 전체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는데도 임기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실상 탄핵 절차를 멈춘 것이 문제였다. 뻔뻔하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트럼프는 혐오 조장과 갈라치기로 2024년 대선에서 부활에 성공했다. 전 세계 정치인에게 잘못된 신호를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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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3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에서 비상계엄 선포를 발표하고 있다. KTV 캡처,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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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불법 계엄과 내란 사태로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다. 그러나 12·14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면 윤 대통령은 아마도 트럼프의 버티기와 대선 두 번째 승리 사례를 교훈으로 삼은 듯하다.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과거가 정치 규범 일탈 세력의 득세로 이어지는 트럼프식 권력 복귀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는 것이다.

트럼프 1기 민주주의 붕괴를 분석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스티븐 레비츠키 등은 트럼프의 일탈에 사회가 압도당하고, 둔감해지고, 묵인하기 시작할 때 미국 민주주의에 끔찍한 결과를 몰고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경고는 현실이 됐다.

1974년 8월 하원 탄핵 표결 직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닉슨은 사임 발표에서 이렇게 밝혔다. “미국의 국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나라의 상처를 치료하고, 지난 시간의 비통함과 분열을 과거사로 돌리는 것입니다.” 국가 이익 앞에서 정치인으로서 염치를 챙겼던 닉슨은 그나마 베트남전 종전과 데탕트의 서막을 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남겼다.

백악관 만찬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할 정도로 미국에 대해 아는 체하던 윤 대통령은 닉슨 사례는 모르는 걸까. 하긴 정상적인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지각 상태였다면 무속에 빠진 아내와 군인에 의지하고, ‘법꾸라지’처럼 대한민국을 이 혼란에 빠트리지도 않았겠지만.

정상원 국제부장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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