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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황인혁칼럼] 과거에 갇혀버린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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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뭔 비리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제 행적을 일일이 소명해야 하는 절차가 까다롭고 귀찮아서요."

최근 만난 A그룹의 고위 임원은 텔레그램만 쓴다고 했다. 채팅 자동 삭제 기능이 있는 데다 보안성이 좋아서다. 이미 상당수 A그룹 임원들이 텔레그램으로 통화하고 문자를 보낸다. 혹시 모를 검찰 수사나 사내 감사에 대비하려는 생존 본능이다.

B대기업의 사장급 인사는 "수첩에 메모하던 습관을 버렸다"고 토로했다. 무심코 남긴 기록이 자신의 뒷덜미를 치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때 '적자생존'(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으로도 사용)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젠 함부로 적으면 죽는 상황이 됐다. 기록의 소멸이자 사유의 추락이다.

뒤탈을 없애려 의사결정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업인들의 행동은 이제 일상이 됐다. 중대재해처벌법과 주52시간 근무제 등 기업을 옥죄는 기존 규제에 더해 새로운 규제 압박이 커지면서 많은 기업이 이중, 삼중의 사법 올가미에 걸려들까봐 전전긍긍한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했기에 망정이지 국회증언감정법이 통과됐다면 기밀 유출을 우려하는 외국계 기업들의 대탈출극이 벌어질 뻔했다. 국회가 자료를 요구하면 영업 비밀이어도 제출하고,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은 영상으로라도 출석해야 한다는 게 이 법의 골자다. 보안을 생명처럼 여기는 기업 입장에선 펄쩍 뛸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이는 상법 개정도 재계의 큰 골칫거리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면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에 급제동이 걸릴 공산이 크다. 손해를 본다고 주장하는 소액주주들이 사사건건 소송을 걸고, 사외이사들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게 뻔하다. 살아남으려는 변신의 몸부림이 통제받는 순간 기업 경쟁력은 추락하고 과거의 유물처럼 화석화될 것이다.

'굿 투 그레이트'의 저자 짐 콜린스는 지속가능한 성공을 위해 비전과 변화, 장기적 안목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법 리스크로 움츠러든 기업인에게 도전정신과 미래 지향적 사고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미래 대비보다는 위기 관리에 자원을 소모하면서 혁신의 골든타임을 놓치기 십상이다.

지난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들과 만났다고 한다. 준감위 위원들은 '삼성 위기의 타개책이 뭔지' 등 여러 질문을 미리 준비했다. 하지만 그날 이 회장의 낯빛이 너무 어두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내년 2월 초에 2심 선고를 앞둔 이 회장에게 적극적인 행보를 기대하기 힘들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거기에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탄핵 사태도 갈 길 바쁜 기업들에 대형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느닷없이 대선 일정이 앞당겨지고 정권이 바뀌면 정책 기조가 뒤집힐까, 새 권력에 찍히면 수사 대상에 오를까 노심초사하는 기업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출범에 대한 대응책 마련도 벅찬데 설상가상이다.

한국은 스스로를 옥죄고 견제와 충돌을 반복하는 '자기 파괴적 악순환'에 놓여 있다. 기업 손발을 묶는 겹규제,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정치 투쟁을 반복하니 미래는 실종되고 나라 전체가 과거의 덫에 빠져드는 모양새다.

국익만을 생각하며 앞을 향해 뛰어도 글로벌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경제위기 국면이다. 중국·대만·일본 등 경쟁국과의 제조업 패권 경쟁만 생각해도 아찔하다. 우리는 2025년 을사년 새해에 미래를 되찾을 수 있을까.

[황인혁 지식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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