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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화)

동학 접주 증조부 행적과 보도연맹 희생 백부 진실 추적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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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1일 오후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자택에서 동학농민혁명 유족 윤재라씨가 증조부 윤세현 선생의 동학 접주 임명증서(1896년 8월)를 펼쳐 보이고 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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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강진만 건너 주작산의 뾰쪽뾰쪽한 바위 봉오리들이 보였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는 한적했다. 지난 1일 오후 대구면 소재지인 수동리 경로당 앞에서 동학농민혁명 유족 윤재라(57)씨를 만났다. 강진 동학 대접주였던 윤세현(1857~1933)의 증손이다. 강진 일대 6개 군을 관할해 ‘육도씨’(六都氏)라는 별호로 불렸던 윤세현은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전달한 인물로 전해진다. 수동리 경로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육도씨가 살던 옛집이 있었다.





전봉준에 다산 ‘경세유표’ 전달한
강진 동학 대접주 윤세현이 증조부
2차 봉기 패배 뒤 교단 활동 계속
후손들의 항일독립투쟁으로 이어져





윤세현은 1892년에 동학에 입도했다. 1880년대 동학이 전파됐던 인근 장흥 동학조직의 영향을 받았다. 강진은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강진엔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윤세현은 다산의 ‘경세유표’를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세유표엔 농민이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토지개혁론과 ‘어질지 못한 천자는 끌어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다산은 자신이 살아서는 공개하지 못한 혁명적인 국가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를 초의선사와 제자 이청에게 전했고, 그 일부가 윤세현에게 전해졌다고 한다(홍동현 강진다산실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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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현 강진 동학 대접주. 후손 윤재라씨 제공


윤세현은 강진 농민군의 지도자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윤시환·김병태 등과 고향을 떠나 참전했다가 귀향했다. 강진 유생 박기현이 쓴 일기 ‘일사’를 보면, ‘동학 30~40명이 총이나 창을 들고…길을 가는데도 의기양양하여 마치 부귀한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장흥 경계로 들어왔다고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도소(집강소)를 설치한 농민군은 활발하게 개혁활동을 펼쳤다. 윤세현의 영향 때문인지 강진 해남 윤씨 집안 출신 동학 농민군이 16명에 달한다. 대부분 장흥과 가까운 대구면과 칠량면에 거주하는 이들이다. 칠량면은 훗날 ‘5·18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의 고향이다. 윤세현은 해남 윤씨 죽사동파, 윤한봉은 참봉공파(향촌파)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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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대접주 윤세현 선생이 독립운동자금과 신간회 성금을 모아 낸 공로로 받은 포상증.


농민군은 2차 봉기에 나섰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 패배 이후에도 반외세 투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장흥 관산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와중에 윤세현의 가족들은 몰살 직전까지 갔다. “관군들이 집에 불을 질렀대요. 그때 두살이었던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등 가족들을 묶어 놓고요. 그런데 이웃 한 사람이 뒷문으로 들어와 창으로 나가라고 새내끼(새끼줄)를 물어뜯었답니다. 풀어져서 사셨다고 그래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윤세현은 가족을 데리고 장흥으로 ‘피난’을 갔다. 윤세현은 세상의 눈초리가 잠잠해지자 교단 활동을 벌였으며, 장흥과 강진 일대 천도교 교단 최고 책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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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때 장흥 관산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윤세현 접주의 생가터로, 윤세현의 가족들이 몰살당할 뻔했던 곳이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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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리의 개혁적인 분위기는 항일독립투쟁으로 이어졌다. 일제 경찰들은 수동리를 ‘한국의 모스크바’로 ‘낙인’찍기도 했다. 수동리 출신 윤가현(1912~1950)은 다섯 차례에 걸쳐 10년 5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930년 1월 강진 대구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투쟁을 이끌다가 1년간 수감생활을 했던 그는 해방 이후 미군포고령 위반 혐의로 또다시 투옥되기도 했다. 6·25전쟁 때 충남도당 인민위원장이었던 그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가현의 조카 윤순달(1914~미상)도 항일혁명운동가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해 검거됐던 그는 서울에서 노조운동을 했다. 1939년 경성콤그룹에서 박헌영을 도와 해방 때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썼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광주시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던 윤순달은 6‧25전쟁 때 빨치산부대 최고 사령관까지 지냈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연락소 부소장(차관급)까지 올랐던 그는 1952년 11월 박헌영(사형)과 함께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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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대접주 윤세현 선생의 장남 윤응규(응하)의 국민보도연맹증.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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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리의 상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조사 결과,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26명,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27명 등 6·25전쟁 발발 3개월 만에 수동리 주민 54명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국민보도연맹은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 관계자를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1949년 결성된 조직으로, 6·25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원 상당수가 집단으로 희생됐다. 윤세현의 장손자 윤응규(응하)도 1950년 7월15일 오후 3시 경찰에 끌려가 장흥 오성금 앞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보도연맹 등으로 주민 54명 희생돼
진실화해위 통해 12건 규명 받아내
“15명 유족,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중”





윤재라씨는 2003년께 귀향해 동학 자료를 아버지한테 건네받아 공부하고 자료를 모았다. 한우 15마리를 키우는 축산농인 그는 이데올로기의 상흔을 안고 사는 일가들을 설득해 2023년까지 3년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요청해 모두 12건의 진실 규명 결정을 받아냈다. 이들 가운데 윤중관(79)씨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사촌 형님 2명 등 4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윤재라씨는 “치매를 앓던 할머니가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장남을 만난다고 장흥 옛 집터에 갔다가 작고하셨다”며 “억울하게 세상을 뜬 15명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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