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부모 손 잡고 나왔던 MZ들, 삼삼오오 국회 앞 집회 참여
이대남·이대녀, 10대·태극기부대까지 응원봉과 노래로 한목소리
지난 12월 7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아이돌 응원봉, 깃발 등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송선교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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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으로 만든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손에는 이제 아이돌·야구팀 응원봉이, 투쟁가와 민중가요가 흘러나오던 대형 스피커에서는 MZ들의 귀에 익은 K-팝이 흘러나온다. 한겨울, 무엇이 2030 젊은이들을 국회 앞 시위 현장으로 불러 모았을까?
집회 문화의 변화를 체감하기 위해선 12월 3일 이전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4년 11월 30일(토) 오후, 서울 광화문 대로변에서 시국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계엄 선포가 있기 전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낮에는 보수단체들이 중심이 돼 ‘이재명 구속’을 외쳤고, 저녁에는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 방식은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촛불단체는 촛불을 들고, 보수단체는 태극기나 성조기를 들었다는 점만 다를 뿐, 진행 방식은 비슷했다. 연령대도 정치에 관심이 높은 중장년층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부모님 손에 끌려 나왔다는 청소년들은 종종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나온 2030 세대는 보이지 않았다. 이날 10시간 동안 진행된 집회에서 마주친 20대는 다섯 명의 여성이 전부였다.
친구들과 함께 군중 속을 다니고 있던 여주희(26) 씨는 “그렇게 깊은 뜻을 가지고 나온 건 아니다”라며 “유튜브 알고리즘에 집회 현장 라이브가 뜨길래 궁금해져서 친구들과 함께 날을 잡고 와 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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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부터 NCT까지, 아이돌 팬덤 총집합
하지만 12월 3일 이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12월 6일(금)부터 국회의사당 앞에서 탄핵 집회가 열렸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인 데다 추운 날씨였음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어린 손녀 두 명을 데리고 대낮부터 국회 앞을 지키던 60대 남성 이호형(가명) 씨는 “계엄 선포 방송을 보면서 옛날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우리 세대가 이뤄놓은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졌다”며 한탄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정상화시키려면 청년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우리 때는 온통 청년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너무 적다”고 했다.
이씨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다음 날인 12월 7일(토)부터는 젊은 층 비율이 높아졌다. 2030 여성들이 아무 데나 서서 한 바퀴 둘러보면 몇 명씩 보일 정도였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손에 든 물건이었다. 구호를 외치는 순간, 이들 머리 위로 올라오는 것은 촛불이 아니라 아이돌 응원봉이었다. 2세대 아이돌 그룹인 소녀시대, 빅뱅의 응원봉부터 뉴진스, 플레이브 등 4세대 아이돌 응원봉까지, 모든 아이돌 팬덤이 총집합했다. 프로야구 응원봉도 일부 보였다.
NCT 응원봉을 들고나온 30대 여성 김진아(가명)씨는 “팬덤에서 응원봉을 챙기자고 따로 말을 맞춘 적은 없다. 보통 아이돌 응원봉은 배터리도 오래 가고 잘 안 꺼지는데, 오늘은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들고나온 것 같다”고 했다.
박희진(20대·여) 씨는 저마다 가지고 나온 응원봉에 팬덤으로서의 염원도 담겨 있다고 했다. “우리 애들(아이돌)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지켜야 한다. 그게 내가 나온 이유다.
가수 이승환이 집회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다. 무대 화면에는 이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송선교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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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부르는 노래도 다름 아닌 K-팝이었다. 이전 집회에서도 에스파의 ‘위플래시’, 로제의 ‘아파트’ 등 최신 K-팝이 나오긴 했지만, 그 노래들은 집회 구호를 박자에 맞춰 외치도록 하는 배경음악의 용도였을 뿐이었다. 이날 사람들이 가장 크게 따라 부른 노래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지드래곤의 ‘삐딱하게’였다. “나온 지 오래됐는데도 아직까지 인기있는 곡들이라 여러 세대가 함께 부르는 것 같다. 특히 가사가 지금 상황에 딱 맞지 않나.” 30대 여성 박정하(가명) 씨가 설명했다.
사람들이 ‘다만세’라고 줄여 부르는 ‘다시 만난 세계’는 힘든 현실 속에서도 사랑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가사를 담고 있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가사의 노래 ‘삐딱하게’가 실린 앨범 이름이 ‘쿠데타’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박씨는 “어른들이 부르는 민중가요는 가사가 너무 재미없다. K-팝으로도 충분히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집회 참여자가 늘자 노점 상인들도 덕을 봤다. 특히 LED 촛불과 응원봉을 판매하는 상인이 훨씬 늘었다. 수요가 몰리자 가격도 자연스레 올랐다. 11월 30일 집회에서는 LED 촛불 하나에 2000원이었다. 12월 6일에는 대부분 상인들이 3000원을 불렀고, 12월 7일에는 5000원이라고 했다. “오늘만 거의 1000개는 판 것 같아요.” 7일 저녁 국회의사당역 5번 출구 앞에서 촛불을 판매하던 남성이 말했다.
LED 촛불·응원봉 등을 판매하는 한 노점상에 사람들이 몰렸다. 이날 기자가 지켜본 5분간 총 15개의 LED물품이 팔렸다. 송선교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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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집회가 점점 커진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과 같이 촛불을 대량 주문해서 오늘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이익을 많이 남겼다”고 했다. 실제로 물품을 하나에 5000원으로 판매하는 노점상 앞에서 5분간 지켜보자 총 15개의 촛불과 응원봉이 팔렸다. 시간 단위로 환산하면 180개, 90만원의 매출이다.
12월 7일 윤 대통령 탄핵이 부결된 이후 집회 참여자가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평일 낮에는 학생들이, 저녁에는 직장인들이 국회를 지켰다.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보수·진보 등의 진영을 가리지 않았다. 12월 13일(금) 낮 국회 앞을 찾은 21세 남성 박찬형(가명) 씨는 자신을 “흔히 말하는 이대남”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나는 이번 총선에서도 국민의힘을 뽑은 보수 성향이지만, 지금 국민의힘의 모습은 많이 실망스럽다”며 “보수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지금 대통령을 탄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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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내가 보수여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다”
이날 저녁에 만난 70대 남성 권진하(가명) 씨는 자신을 “8년 전 태극기 집회에도 나간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윤석열 탄핵’ 문구가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난 아직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우리 딸들한테 총칼을 겨누려고 했던 것 아니냐. 아무리 내가 보수여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모님을 따라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도 많았다. 한 초등학생은 “신기하고 재밌다. 나중에도 나라에 일이 생기면 집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송선교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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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손을 잡고 거리에 나온 초·중학생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8살 초등학생 가민수(가명) 군은 “신기하고 재밌다. 나중에도 나라에 일이 생기면 집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20대 중에서는 8년 전 박 전 대통령 탄핵 집회 때 부모님과 함께 나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김은서(23·여) 씨는 “과거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님 따라 나갔던 집회에서 민주주의를 배웠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올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집회 참여 방식은 촛불이나 응원봉에 국한되지 않았다. 트럭 한 대로 전국 곳곳을 다니며 커피차 사업을 하는 안준호(54·남) 씨는 이날 자신의 트럭을 국회 앞으로 끌고 왔다. “촛불 들고 서 있을 자신은 없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다가 시민들에게 내가 가장 잘하는 커피를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안씨는 아들과 단둘이서 커피 1000잔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시민들이 집회 중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이날 커피차 사장 안준호 씨는 아들과 단둘이서 커피 1000잔을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송선교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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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창의성으로 웃음… 평범한 시민 많이 모여
집회가 거듭될수록 중장년층도 MZ가 주도하는 집회 문화에 동참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딸아이의 응원봉을 빌려 왔다”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편의점에서 “여기는 응원봉 안 파냐”고 직원에게 묻는 50대 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젠 촛불이아닌 응원봉이 대세라고 들었다. 그래서 동참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재치 넘치는 이름의 깃발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실제 활동하는 시민단체의 깃발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일반 시민이 재미로 만들어온 이름의 깃발이 더 많았다. ‘코노(코인노래방)사랑 중딩연합’, ‘수학의정석 41페이지 탈주자 모임’ 등 시민들은 각자의 창의성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깃발을 든 한 시민은 이것이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념을 가진 단체가 아닌, 정말 평범하고 일반적인 시민들이 많이 모였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깃발이 많이 보일수록 시민들의 목소리에 힘이 더 실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집회를 구경하러 온 외국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대학원생 판탈피니 씨는 “가까운 곳에서 학회를 마치고 호기심에 잠시 들렀다. 지금 한국의 상황은 전 세계에서 메인 뉴스다. 이탈리아와 홍콩에 있는 온 가족이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아일랜드에서 온 20대 남성은 “한국의 상황이 많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왔는데, 사람들은 즐거워 보여서 정말 신기하다. 유럽에서도 집회가 자주 있지만 이런 건 처음 본다”고 말했다.
젊은 남성도 집회에 많이 나오긴 했지만, 여성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한 20대 여성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며 집회에 나오지 않는 남성 친구들이 많다. 중립과 무관심은 엄연히 다르다고 본다. 집회 참여를 강제할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무관심한 것에 실망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집회에 나오지 않은 20대 남성 정모 씨는 “여자가 많고 응원봉이 많다는 뉴스를 봤지만, 모두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박혜진(20대·여) 씨는 “그동안 사회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거리에서 연대해 온 경험은 여성들이 더 많다. 이 경험이 이번에도 여성들이 주저하지 않고 거리로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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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가 얼마나 큰 힘 가졌는지 알게 됐다”
두 번째 탄핵 표결일인 12월 14일(토), 집회는 정점을 찍었다.
MZ들은 아이돌 공연장과 프로야구장에서 사용하던 응원 문화를 완전히 집회로 가져온 듯 했다. 손에 ‘윤석열 탄핵’ 등이 적힌 피켓만 없다면 축제 현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여의도공원 한쪽에서는 스피커에서 EDM이 흘러나와 사람들이 방방 뛰기도 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탄핵안이 가결됐다는 소식을 영상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게 소리치며 환호했다.
지난 12월 14일 탄핵 표결 결과 방송을 숨죽여 듣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탄핵이 가결된 이후 시민들은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송선교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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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0대 남성은 “가결될 것이 확실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더욱 기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살아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지난주 탄핵 부결 후 시민이 흘린 것과 반대되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혜경(58·여) 씨는 “20, 30대 너무 고생했다”고 혼자 크게 외쳤다. 그렇게 외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번 탄핵은 2030 세대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그동안 젊은 세대가 정치 참여를 하지 않은 것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경쟁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에 책임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2030들이 스스로 자신을 깨고 나와준 것 같아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또 그와 함께 이곳을 찾은 윤희숙(60·여)씨는 “응원봉이랑 K-팝이 대통령을 탄핵시킨 것이다. 이번에 K-문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마냥 기뻐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부 시민들은 탄핵 가결 직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이름을 연호했지만 20대 남성 남성우(가명) 씨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이번 탄핵은 전적으로 옳다고 밝히면서도 “윤 정부가 끝나도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되면 또 국정이 안 좋아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탄핵 이후에도 정치 양극화가 이어질 것임을 우려하는 목소리로 들렸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부른 노래는 역시 소녀시대의 ‘다만세’였다. 여느 때보다도 합창의 소리가 컸다. “지금은 걱정보단 희망만 생각할래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죠.” 탄핵이 가결된 후 오후 6시, 저무는 해 아래에서도 청년들은 광장에 남아 노래를 불렀다. 저무는 역사의 하루 끝에, 민주주의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송선교 월간중앙 인턴기자 ddoong04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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