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난민 당사자로서 참여하고 있는 난민인권 시민단체 ‘아시아평화를향한이주’(MAP)의 활동 일환으로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고 있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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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여자’(필명) | 자동차 부품 공장 노동자
나는 딸만 여섯인 집의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이집트에는 딸만 가진 집에 대한 편견이 심했기에 나는 없는 아들을 대신하려 애썼다. 가족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공부 끝에 나는 한 대학의 매스컴학부 저널리즘학과에 진학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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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이집트에서는 독재 정권에 맞서 2011년 1월 혁명이 일어났고, 나는 결혼과 이혼을 겪고 있었다. ‘여자에게 결혼은 필수’라는 이집트 사회의 통념을 이길 수 없어 결혼했지만, 사회는 이혼한 나를 ‘중고’라 부르며 더욱 거센 억압을 가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개인적인 삶 속 싸움들, 그리고 혁명이라는 큰 싸움을 동시에 치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기자 일을 시작한 건 2012년이다. 부패한 정권과 결탁한 언론사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심 끝에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라스드 뉴스 네트워크’에서 유튜브 콘텐츠 제작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2012년 6월 최초의 민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의 당선도 잠시, 군부는 쿠데타를 선언했고 2013년 7월 무르시와 그의 지지자들을 체포했다. 군부는 언론을 통제하기도 해서 나 역시 처벌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견디며 비밀리에 일했다. 동시에 기자 일을 조금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검열 대상이 아니었던 언론사 ‘다마스쿠스의 목소리’에서도 일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이집트에 거주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자리에, 언젠가 내가 한국에 거주하는 이집트 난민으로 있게 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집트 현대사에서 2013년 8월14일은 끔찍한 날이다. 이날 이집트 군대와 경찰은 무르시 대통령 복권 시위에 나선 시민 700여명을 죽였다. 희생자 중에는 시위 현장에서 일하던 기자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 개인의 안전을 택할 것인지, 기자의 소명을 다할 것인지 말이다. 군부의 폭력과 통제에 위협받던 건 기자들뿐 아니라 인권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한 인권활동가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 사이에서 난 딸의 부모가 되었다. 남편은 내가 기자 일을 지속하는 것을 지지했다.
2016년 폭력과 통제는 더욱 가혹해졌고 나와 남편은 정말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 탈출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두살배기 우리 딸에게서 부모를 앗아가게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던 한국이 우리 셋의 목적지가 되었다.(이후 한국 정부는 2018년 9월1일부터 이집트인을 무비자 입국 대상에서 제외했다.) 나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아들과 금방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만, 재회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식중독에 걸린 딸을 위해 의사를 부를 수 있는지 물었고, 우리에게 돌아온 건 모욕과 질책뿐이었다. 입국 뒤 우리는 의지할 것이 전무한 채, 망명자에게 주어진 권리의 벽을 체감하며 매일같이 새로운 문제에 부닥쳤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건 네해가 지나서다. 다만 난민 인정 뒤에도 삶이 그리 나아진 건 아니다. 물론 추방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권리를 위해 매번 싸우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최악의 조건에서 최소한의 임금을 받고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간다.
필자는 2년째 자동차 부품 생산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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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2년째 자동차 부품 생산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첫해는 비교적 수월했지만, 둘째 해부터는 물리적 힘이 많이 드는 난도 높은 작업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너무 힘겨워 작업장 변경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나는 퇴근 뒤 매일같이 고통받는다. 집안일을 잘해낼 수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그저 이런 질문들을 혼자 되뇐다. 내 삶은 대체 언제까지 내게 맞지 않는 일자리에서 낭비되는 걸까? 어째서 누구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왜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의 기술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는 걸까?
한편 지난 4년간 나는 한 난민 인권단체에서 난민으로서 학생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만나며 난민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있다. 이런 순간만큼은 저널리즘으로 복귀한 듯하다. 나는 한국에서도 기자로 일하고 싶다. 기자 일은 내가 대학과 전 직장들에서 훈련받아 잘할 수 있는 일, 우리 가족과 나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어려워도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언젠가 아랍 문학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겠다는 꿈도 나에게 있다.
번역 현정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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