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예약이 필수가 되고, 셰프의 이름이 브랜드가 된 이 시대.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이제 단순 관광보다 맛있는 음식을 찾는 데 더 열심이다.
이런 흐름에 맞춰 한국관광공사가 최근 제작한 ‘K-로컬 미식여행 33선’ 가이드북에 전문가로 참여했다. 취재를 통해 전국 각지의 식도락을 즐길 수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겨울에 맛과 풍미가 한층 깊어지는 별미들을 선별해 봤다.
한파가 몰아칠수록 더욱 감칠맛이 농밀해지는 해산물부터 차가운 날씨가 오히려 식감을 돋우는 별미까지. 추운 계절, 혀끝을 달래줄 겨울의 맛이다.
꽉 찬 단맛, 울진 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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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깊은 바다(수심 200m 이상)에서 서식하는 대게는 겨울이 다가올수록 몸에 영양분을 저장해 추위를 대비한다. 영양분을 비축해 두었다는 것은 맛이 차올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겨울이 대게의 제철이라고 하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대게는 동해안 전역에서 쉽게 맛볼 수 있지만, 특히 경북 울진의 후포항과 죽변항, 영덕의 강구항에 대게잡이 어선이 많다. 이 시기만큼은 항구 주변에 자리한 식당 대부분이 국내산 대게를 내놓는다.
주로 대게찜을 많이 취급하는데, 살 자체에 깔끔한 단맛을 지닌 대게를 먹기에는 가장 좋은 조리법이다. 대게의 두툼한 다리(대나무를 닮았다고 해 ‘대게’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에 가득 찬 살을 맛본 뒤에는, 꼭 내장과 함께 밥을 비벼 먹어보기를 바란다.
대게짜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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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메뉴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대게 또는 홍게를 라면에 넣고 끓이거나 게살 볶음밥, 게살 짬뽕, 대게탕 등을 내놓는 식당도 하나씩 등장하고 있다. 된장 국물에 갖은 재료를 넣고 대게 살을 풀어 내어주는 대게짜박이 또한 이색 요리로 손꼽힌다.
감칠맛 폭발, 홍성 새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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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홍성 남당항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을에는 대하를, 겨울에는 새조개를 먹기 위해서다. 수온이 가장 낮을 때인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새조개의 제철이다. 남당항에 새조개 전문 식당이 즐비하며, 1월에는 축제도 열린다.
샤부샤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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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조개는 조갯살의 끝부분이 새 부리처럼 굽어 있는 조개다. 한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살이 차올라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다. 새조개를 주문하면 대개 샤부샤부 형태로 내어준다. 국물은 갖은 채소로 맑게 끓이고, 여기에 새조개 살을 데쳐 먹는 식이다. 가리비 등 다른 조개를 넣어 국물의 감칠맛을 더하기도 한다.
내장을 제거한 채 나온 새조개 속살을 국물에 살짝 담가서 익혀 먹는다. 8~10초 정도만 데치면, 새조개의 쫄깃함을 살리면서도 단맛이 쭉 올라온다. 처음에는 소스 없이 새조개 본연의 풍미를 즐겨보자. 이후 초장 등 곁들여주는 양념을 찍으면 다채로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다 먹은 후에는 잊지 말고 칼국수 또는 우동 면을 넣자. 새조개가 내어준 감칠맛이 국물에 듬뿍 배어들었을 테니 말이다.
깊은 바다 풍미, 통영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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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은 겨울철(11~3월)에 가장 맛이 깊다. 수온이 내려가면 몸에 지방을 축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감칠맛과 풍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제철을 맞은 굴은 입안 가득 고소한 풍미와 달콤한 맛, 혀끝에 살짝 감기는 짭조름하고 청아한 바다 내음을 동시에 선사한다.
경남 통영과 거제 사이 바다는 국내에서 가장 굴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국내 굴 생산량의 80%가 이곳에서 난다.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선이 양식장 연안의 물결을 잔잔하게 만들어 양질의 굴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해외에서는 고급 식재료이지만, 국내에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지형적 특성 덕분이다. 통영항, 강구안 주변으로 굴 전문 식당이 많다. 굴구이, 굴찜, 굴국밥, 굴밥, 굴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굴을 선보인다. 식당마다 조리법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요리사의 손맛이라고 해야 할까.
굴국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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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마다 굴의 풍미가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굴의 가장 순수한 맛을 느껴보고 싶다면 아무래도 생굴이다. 레몬즙에 생굴을 살짝 찍어서 입에 넣으면, 살에 응축된 단맛과 바다의 짭짤한 맛, 레몬의 산미가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찰진 식감, 목포 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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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는 예로부터 홍어로 유명한 지역이다.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육지(목포, 나주 등)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삭혀졌던 것이 오늘날 홍어 요리의 시작이다. 냉장 시설이 충분치 않았던 시절, 장거리 운송 중 발효가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독특한 맛과 향을 만들어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홍어는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지만, 날씨가 추워지는 시기에 맞춰 살이 차오른다. 식감이 더 풍부한 홍어를 맛볼 수 있다는 의미다. 최근 목포의 홍어 전문점들은 국내산과 외국산 홍어를 나누어 판다. 당연하겠지만, 국내산 홍어의 가격이 조금 더 비싸다. 겨울철이라면 국내산을 선택할 이유가 충분하다. 신 김치와 돼지고기 수육을 함께 먹는, 이른바 ‘홍어삼합’은 목포를 넘어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별미로 자리를 잡았다.
홍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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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의 톡 쏘는 맛을 김치의 산미가 눌러주고, 돼지고기의 묵직한 단백질과 지방질이 다른 두 재료의 강렬한 맛을 부드럽게 받친다. 한입 가득 넣어 씹어 넘긴 뒤에 마시는 막걸리는 화룡점정이다.
삭힌 맛이 부담스럽다면, 생홍어는 어떨까. 본래 산지에서만 즐기는 별미였지만, 이제는 전국 어디서나 맛볼 수 있게 됐다. 삭힌 홍어의 톡 쏘는 향 없이, 찰진 식감과 담백한 풍미가 매력적이다. 요즘 뜨는 별미로는 홍어 라면도 있다.
김치가 ‘킥’ , 의정부 부대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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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하고 매콤한 국물이 생각난다면 의정부로 향하자. 의정부 부대찌개는 한국의 현대사, 이국적인 식재료, 겨울철 별미가 한데 어우러지는 상징적인 음식이다. 한국전쟁 직후 주한미군 부대에서 민간 시장으로 흘러들어온 햄과 소시지가 김치찌개와 만나며 전에 없던 새로운 풍미를 낳았다. 왜 겨울철에 맛보아야 하느냐고? 늦가을에 담근 김장김치로 끓이면 더 깊은 감칠맛을 즐길 수 있어서다.
부대찌개는 주한미군 부대가 주둔한 지역에서 발달했다. 동두천, 평택(송탄), 그리고 의정부가 그렇다. 특히 의정부가 대표적이다. 의정부중앙역 인근에 부대찌개 거리가 조성되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요리를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의외로 시작은 찌개가 아니었다. 1960년대 주한미군 부대에서 나온 식재료를 한국 스타일로 볶아 먹은 ‘부대볶음’이 그 시작이었다. 부대볶음에 김치와 육수를 첨가해 찌개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한국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던 맛이기 때문이었을까. 기본 재료에 갖가지 부재료를 더하는 사리 문화 또한 부대찌개를 통해 발달했다. 라면이나 당면, 떡, 만두, 심지어 치즈까지 넣는다. 한식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이제는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된 부대찌개. K팝으로 이어지는 한류 문화를 닮은 이 요리의 맛을 가장 깊게 느끼고 싶다면 의정부가 답이다.
비밀은 양배추, 춘천 닭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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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질한 닭고기에 매콤한 양념, 여기에 양배추를 잔뜩 얹어 볶는 춘천 닭갈비 또한 사계절 언제나 즐길 수 있는 요리다. 그러나 깊은 단맛과 감칠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겨울부터 봄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맛보는 것이 좋다. 채소, 특히 양배추의 단맛이 진해지는 시기가 바로 이때라서다.
춘천은 닭갈비의 발상지다. 시작은 ‘닭불고기’라고 부르는, 숯불에 구운 닭고기였다. 돼지고기 대신 닭고기를 구워서 ‘돼지갈비’의 대체재 형태로 탄생한 요리다. 지금도 춘천 명동닭갈비골목을 비롯해 여러 식당에서 숯불구이 닭갈비를 판매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둥근 철판에 볶아내는 닭갈비는 여기에서 변형된 것이다. 닭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고, 매콤한 양념을 추가한다. 숯불 닭갈비가 닭고기 본연의 맛을 극대화하는 형태라면, 철판 양념 닭갈비는 채소가 어우러지며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형태다. 닭은 그저 거들 뿐, 양념 닭갈비의 맛은 채소의 단맛이 좌우한다고 해도 좋다.
볶음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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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 닭갈비를 다 먹은 후에는 반드시 볶음밥을 먹자. 채소의 단맛이 빠져나온 양념에 밥을 비비고, 치즈 등 다양한 사리를 추가하면 더욱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닭갈비의 디저트’라고 부른다. 한국 스타일의 미식 문화가 철판 하나에 오롯이 담겨 있다.
통영·목포·울진·의정부·춘천·홍성 | 글 김정흠 여행작가, 사진 김정흠 여행작가·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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