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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반도체산업 부지런함 사라졌다?... 산업 위기에 '주 52시간' 탓한 공학한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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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자-기업인 특위, 위기 원인 연구 발표
10개월 분석 결과는 인프라, 규제, 인재 탓
"기업의 전략과 혁신 실패 반성은 왜 없나"
한국일보

작업자들이 반도체 공장 생산 라인을 지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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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비밀병기인 부지런함이 없어지고 있다. 30분만 더 하면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퇴근 후 다음 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18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국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위원회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한국 반도체산업의 위기 징조를 이같이 진단했다. 주간 근로시간을 최대 52시간으로 제한한 근로기준법 때문에 인적 생산성이 크게 낮아져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학한림원 반도체특위는 이날 약 10개월간 연구한 '국내 반도체산업 생태계 현황 진단 및 산업 선도전략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이 교수와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특위는 국내 반도체산업 위기를 절감하고 지난 2월부터 공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위의 분석이 기업 내부 측면보다 재정 지원과 노동규제 같은 외적인 요소에 쏠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교수가 꼽은 또 다른 위기 징조는 메모리 반도체 기술 평준화다.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이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R&D)과 제조시설에 적극 투자하면서 한국과 해외 기업 간 기술력 격차가 줄었다는 것이다. 반도체 제조공정을 뒷받침해야 하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은 취약하고,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패키징(후공정) 산업은 성장 기반이 미약하다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기업 대상 환경·노동규제, △인재 해외 유출도 위기 원인으로 제시됐다.
한국일보

1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위원회 위원들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공학한림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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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위는 이날 △정부의 재정 지원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국내 반도체산업 생존 대책으로 제시했다. 지난달 여당이 발의한 ‘반도체 특별법’과 같은 방향이다. 특위는 제조 경쟁력 강화를 위해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인프라와 R&D 투자에 향후 20년간 1,000조 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을 내놓으며, 이 중 300조 원이 국가의 보조금·기금으로 지원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은 전략적으로 세액공제를 넘어 직접 보조금을 지급한다”며 “현재 반도체산업의 투자 역량이 떨어지는 부분을 보전만 해준다면 이후 50년 먹거리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생태계 조성을 위한 공적 투자 필요성도 제기됐다. 권석준 성균관대 고분자공학부 교수는 “TSMC는 창업 초기 대만 연금펀드의 투자를 받는 등 사실상 공기업처럼 육성됐다”며 “우리도 기존 인프라나 인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해 KSMC라는 공적 파운드리를 만들어 궁극적으로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위는 또 인력난 해소를 위해 ‘반도체 산업 근로시간 규제 적용 예외’와 ‘반도체 특별 연금법’을 제안했다. 중소·중견기업과 비수도권 기업 종사자를 위한 연금으로 반도체산업 진출 유인을 만들자는 것이다. 안 전무는 “인력에 드는 비용을 낮추는 대신 획일적인 노동규제만 풀어도 생산성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술 흐름을 놓쳤고 위기관리에 취약했다는 등 반도체기업 조직 자체의 문제도 사회 곳곳에서 적잖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특위가 이 같은 내부 진단을 언급하지 않은 데 대해, 학계가 대기업과 손잡고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한국 반도체산업의 위기가 커진 건 인공지능(AI) 반도체 부상 등의 시장 변화에도 기업이 전략적 선택과 혁신에 실패했기 때문인데, 내부 반성 없이 인력과 지원 탓을 하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혁신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허심탄회한 원인 분석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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